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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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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인 날의 목욕

따뜻한 욕조에 복분자주 한잔, 목이 물에 잠길 때… “엄마를 닮았나”
등록 2016-05-01 03:53 수정 2020-05-03 04:28
이슬아

이슬아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기 시작했다. 아끼던 입욕제도 풀어 넣었다. 좋아하던 머스마한테 방금 차인 여자애가 내 방으로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나는 그 여자애한테 늘 시큰둥했다. 걔는 화장도 너무 진하고 말도 너무 많아서 같이 있다보면 내 눈과 귀가 피곤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화기 너머로 차였다는 얘기를 듣자 내게 있는 살림을 다 동원해 그 애를 위로하고 싶어졌다. 입욕제가 물에 잘 녹았는지 욕조에서 보라색 거품이 퐁퐁 솟아올랐다.

물이 반만큼 차올랐을 때 여자애가 내 방에 도착했다. 화장이 진했지만 말은 별로 없었다. 울고 있진 않았지만 곧 울상이었다. 여자애는 옷을 훌훌 벗고 나의 욕조에 입장했다. 걔는 온몸이 하얗고 다리가 길었고 가슴이 소박했다. 그리고 가슴팍엔 조그맣게 소나무 문신이 새겨 있었다. 여자애의 이름 한자를 풀어쓰면 ‘다부진 소나무’라는 뜻이랬다. 그 이름은 아빠가 지어줬다고 했던 것 같다. 나는 아까 편의점에서 큰맘 먹고 6천원이나 주고 산 복분자주 한 병을 들고 여자애가 몸을 담근 욕조 옆에 앉았다. 자주색 술을 머그컵에 콸콸콸 따라서 건넸다. 목욕물의 열기 때문인지 여자애는 단숨에 취했다. 볼따구니가 뜨거워 보이는 여자애가 입을 열었다.

“우리 아빠가 출가하기로 했을 때 있잖아. 엄마가 아빠한테 뭐랬는지 알아?”

그것은 1년 전 일이었다. 여자애의 아빠는 오랜 고민 끝에 출가하여 절에 들어가셨다. 속세를 떠나는 건 아빠의 오랜 염원이었다. 아빠가 영영 떠난 집에는 여자애와 여자애의 엄마만이 남았다.

“우리 딸 대학 등록금은 어떡할 거냐고 물어보더라. 어이가 없었어. 아빠가 돈 안 벌어온 지 벌써 몇 년짼데 그런 걸 물어. 다음 질문은 더해. 우리 딸 시집갈 때 예식장에서 손은 누가 잡아주냐고 묻더라. 그래서 내가 말했어. ‘엄마, 나 결혼할 생각 없는데?’ 그랬더니 엄만 분을 이기지 못해서 베란다로 달려가서 난간을 부여잡더니 뛰어내리겠다고 난리를 쳤어. 나는 뚱뚱한 엄마 허리를 껴안고 이러지 말라고 했지. 조용한 우리 아빤 말없이 앉아 있었어. 그날 우리 엄마가 얼마나 바보인지 알았어. 제일 중요한 질문을 못하잖아. 남편이 중이 되겠다고 떠나는 마당에 대학 등록금이 대수야? 예식장에서 딸 손잡는 게 대수냐고.”

내가 물었다. “그럼 뭐가 대수야?”

“당신 떠나면 나는 이제 어떡하냐고, 외로워서 어떻게 혼자 지내냐고, 사실 그 말이 제일 하고 싶었던 거잖아 엄마는. 그런데 끝까지 그 질문은 못하더라. 결국 아빠는 짐 챙겨서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는 산속 절로 들어갔어. 아무 소식도 없이 시간이 흘렀어. 우리 모녀는 각자 살길을 찾아나갔지. 그러다 몇 달 만에 문자가 오더라. 산이 추우니 아무 잠바나 하나 보내달라고. 그걸 읽자마자 엄마는 유명한 등산복 브랜드 매장에 달려가서 40만원짜리 패딩을 사더니 당일에 도착하도록 택배를 부치더라.”

여자애의 홍조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여자애가 말했다.

“그런데 오늘 차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나는 짜증날 정도로 엄마를 닮은 것 같다고.”

여자애는 입을 닫고 목이 물에 잠길 때까지 푹 몸을 담갔다.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안 했다. 걔가 오늘 거절의 말을 들은 뒤 어떻게 대답했는지 안 물어보았다. 왠지 그냥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자애 가슴팍에 새겨진 소나무 문신이 물속에서 흔들렸다.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어서 욕조에 뜨거운 물을 더 부었다.

이슬아 손바닥문학상 수상자·레진코믹스 만화 ‘숏컷’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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