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가 익기도 전에 병들지 않았다면. 한국 민주주의의 척추에서 탈출한 추간판 같은 정부가 집권하지 않았더라면. 목련을 닮은 아가씨의 투피스 날렵한 정장에 왈칵 쏟아진 먹물처럼 권력자의 마음이 엉망이지 않았다면. ‘21세기 리바이어던’ 765kV 초고압 송전탑이 없었다면. 시민들의 의지가 점묘화처럼 점점이 산에 박힌 감과 같이 조금 더 붉었더라면. 그랬다면 밀양은 덜 고단했을까. 참말 그랬더라면 단장면 용회마을 구미현 어르신의 주름이 단 하나라도 덜 아팠을까.
국가폭력에 맞선 경남 밀양의 10년 싸움을 학술적으로 접근한 첫 책이 나왔다. (장훈교 지음, 나름북스 펴냄, 1만7천원). 어떤 책인가. “학술적 분석틀을 가지고 밀양의 아픔과 연대를 해석하려 하고, 또 그 해석의 적절성과 유용성을 나누어보고자 하는 최초의 시도이며, 게다가 과감하고 용감한 시도다.”(김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지은이 장훈교(41)는 비판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젊은 학자다. “타자에 대한 폭력과 공존하면서 이 폭력과의 연결을 부정하고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내 일상을 영위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 그리고 원인 모를 죄책감, 혹은 비판 사회과학 연구자로서 느끼는 자신의 위선에 대한 환멸이 이 책을 준비하는 동력이 되었다.” 집필 동기다.
책의 핵심 개념은 다음 넷. ① 삶과 장소 ② 점령과 점거 ③ 고립과 연대 ④ 공통자원. 개념의 타래를 푸는 단초는 각각 다음 문장을 저작하는 데서 시작한다. ① “밀양 투쟁은 장소로부터 삶을 추방하려는 한국전력과 정부의 전략에 대항하여 장소와 삶의 결합을 방어하려는 주민들의 투쟁으로 구조화된다.”(193쪽) ② “주민들의 ‘점거-야영’ 운동의 물리적 패배가 곧 밀양 투쟁의 패배로 귀결된 것은 아니다.”(213쪽) ③ “밀양의 연대 방식은 장소에 대한 감정과 정체성을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245쪽) ④ “울력을 통해 마을을 공통자원으로 재생산하고자 하는 밀양 주민들의 투쟁은 국가 전력망을 위로부터 조직화된 폭력을 통해 부과하려는 정부와 한국전력에 대항해 국가 전력망에 대한 대안적인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272쪽)
지난해 12월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가 엮은 와 이 세상에 나왔다. 기록이다. 앞서 지난해 5월에는 한 달 동안 밀양의 할매·할배들이 전국 핵발전소와 송전탑 지역 2900km를 다니며 ‘탈탈’(탈핵·탈송전탑)의 메시지를 전한 여정을 기록한 (이계삼 기록, 한티재 펴냄)도 출간됐다. 연대다. 2014년 4월 송전탑 건설 반대 주민 17명의 상처와 분노를 기록한 (밀양구술프로젝트 지음, 오월의봄 펴냄)도 있다. 발언이다.
학술적 분석을 시도한 이 책의 발간을 계기로 밀양 10년 싸움은 발언-기록-연대-분석으로 이어지는 ‘사각의 프리즘’을 갖게 됐다. 이 진실의 창으로 밀양은 새로운 10년을 준비하고 있다. 울력은 여러 사람이 힘을 합치는 것이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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