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가지 않는 땅에 가장 강력한 문학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여성들이 겪은 처참()에서, 체르노빌 방사능이 삼킨 자들의 참혹()에서, 꾸미고 지어내도 더 이상 극적일 수 없는 누군가의 현실에서, 문학에 갇히지 않는 가장 치열한 문학은 꿈틀댔다.
그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려 벨라루스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장르의 경계에서 전략적 글쓰기를 해왔다. 그의 ‘경계의 글’에 2015년 10월 노벨문학상이 주어졌다. (이야기가있는집 펴냄)은 한국에서 출간된 알렉시예비치의 세 번째 책이다. 연방 해체 뒤 모든 것이 바뀌어버린 옛 소비에트 사람들의 들뜸, 불안, 희망, 좌절, 분노로 책은 채워졌다. 세계 최강국을 향한 추억과, 그 시절 품었던 자존감과, 철권통치·감시사회의 공포와, 새로 도래한 ‘자유의 무게’가 모자이크처럼 뒤섞여 ‘붕괴 뒤 20여 년’의 변화상을 구성한다.
저널리즘에서 발원한 그의 글쓰기는 수사와 은유로 우회하지 않는다. 인간을 파괴하는 격동 속으로 돌진함으로써 인간 세계를 통찰하는 문학의 본령을 육박한다.
‘파괴의 격동’이 물리적 폭력 형태만 띠는 것은 아니다. 낯선 자본주의에 노출된 ‘호모 소비에티쿠스’ 혹은 ‘소보크’(소비에트 시대의 사고방식과 행동에 갇혀 사는 사람들을 비하한 표현)의 당혹이 가감 없이 펼쳐진다.
“특정 사상에 유착되어 그 사상을 뽑아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숙이 자기 안에 심어놓은” 사람들의 눈앞에 “산딸기색 재킷을 입고 굵직한 금반지를 낀 젊은이들”이 나타난다. “전시(戰時) 심리” 상태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대는 심장을 안은 채 살았던” 사람들이 “돈이 있으면 인간이고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에 몸을 떤다.
자유를 만났다고 생각했으나 “자유란 것은 알고 보니 러시아에서는 줄곧 모욕을 당해왔던 속물근성이 회생한 것”이란 깨달음도 뒤따른다. 공산주의가 내려온 자리엔 “욕구와 본능이라는 어둠의 왕”이 앉았다. 시장의 자유에 눌려 사람들은 등이 굽었고, “머릿속에서 180도 회전이 일어나” 정신병원은 환자들로 북적였다. 알렉시예비치는 “물건이 사상과 말의 가치와 같아졌”다며 새 시대를 요약했다.
그가 채집한 목소리들은 단일 음역대가 아니다. 영광된 과거를 말아먹은 현재를 증오하는 사람, 현재의 끔찍함 때문에 과거를 희구하는 사람, 끔찍한 현재보다 과거를 더 끔찍해하는 사람, 공산당 간부부터 반대세력의 부인, 학살자부터 정보요원까지 포괄한다.
한 대학강사가 작가에게 들려준 ‘희망 없는 세대’의 모습은 한국 청년들의 오늘과도 겹친다. “지금의 학생들은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불평등, 가난, 뻔뻔한 부라는 것이 무엇인지 속속들이 알고 있고 뼈저리게 느낀 아이들이에요. 학생들의 눈에 약탈당한 국가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한 부모들의 삶이 적나라하게 비친 거예요.”
사건이 종료되면 ‘사건 이후’가 시작된다. 사건이 수습되는 시점부터 지독한 일상은 출발한다. 시간의 실핏줄을 더듬고 잔뼈까지 추려낸 뒤에야 가늠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알렉시예비치는 ‘세기적 사건’이 지나간 자리로 되돌아가 현재의 삶에 똬리 튼 사건의 의미를 찾아낸다. 당이든 자본이든 맹목의 체제가 담보하지 못하는 개인의 일상들이 그의 언어에 실려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는 글로써 “미래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보이지 않는” 현실과 싸운다. 러시아가 그의 글을 문학이 아닌 ‘기획취재물’로 폄훼할 때에도 그의 글은 가장 문학적이다. 가장 전복적이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font color="#C21A1A">▶ 바로가기</font>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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