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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의 원형

1965년 타결된 한-일 수교 협상 전말을 담은 <일한 국교정상화 교섭의 기록>
등록 2016-01-14 20:10 수정 2020-05-03 04:28

기록을 대하는 태도는 당대의 권력이 역사를 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기록을 정직하게 남기는 것이 역사에 대한 책무이거나 자신감의 표현이라면, 기록을 치밀하게 통제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독점이거나 은폐의 욕망이다. 1965년 한-일 수교 협상과 2015년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및 한-일 위안부 협상(2015년 12월28일)은 아버지의 시대에서 딸의 시대로 계승된 ‘기록을 대하는 권력의 변하지 않는 태도’로 읽을 수도 있다.

(이동준 편역·삼인 펴냄)은 일본 정부의 작업이다. 한-일 수교(1965년 6월22일) 2년8개월 뒤 일본은 회담에 관여한 외무성 관료 19명으로 편집위원회를 꾸려 2년6개월간 기록을 모으고 생산했다. 14년(1951~65년)간 양국 정권을 바꿔가며 1500회 이상 거듭된 협상의 전말과 비사가 망라됐다. 일본이 전후 한-일 관계의 밑그림을 그리는 과정과 그 ‘기획’에 성공한 내각의 자부심이 깔려 있다.

일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서술됐다는 점을 전제해도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예민한 사실’이 많다. 최근 ‘위안부 협상 합의’에 이르기까지 대일본 관계를 꼬아버린 매듭의 뿌리가 보인다. 1961년 11월 일본 총리 이케다 하야토는 그의 관저에서 박정희에게 말했다. “청구권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상쇄(相殺) 사상이 나온다.” 박정희는 답했다. “청구권이라고 말하지 않고 뭔가 적당한 명의라도 괜찮다.” 식민지배에 대한 국가 배상을 이끌어내기보다 경제 논리로 협상에 임한 박정희의 태도가 엿보인다. 독도를 두고 김종필이 ‘제3국(미국) 조정안’을 제시했다는 내용도 있다. 지금까지 김종필은 한-일 수교 회담에서 독도는 논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비타협 입장’을 지켰다고 밝혀왔다.

옛 식민지를 바라보는 일본의 시각은 노골적이다. 1953년 구보타 간이치로 일본 수석대표는 외무성 보고서에 적었다. “조선인은… 마치 일본에 전승국으로서의 진사(陳謝·까닭을 설명하며 사과의 말을 함)를 요구해야 한다고 착각하고 있다.” 이승만 정권 타도를 유도해야 한다는 놀라운 주장도 펼친다. “이승만은 종래의 반일 사상을… 독재정권 유지를 위해 이용하고 있다. …우리 측으로서는 이승만 타도를 위해 노력을 개시해야 한다.”

한-일 갈등은 늘 ‘동북아 삼각 동맹’의 방해물이었다. 박정희 군사 쿠데타 한 달 뒤인 1961년 6월20일 방미한 이케다에게 대통령 취임 5개월 된 케네디는 “양국 관계 타개”를 주문했다. 이케다는 “천 년도 전부터 한반도는 일본 자신과 같은 것”이라고 화답했다. 미국은 2015년 위안부 협상에서도 한-일 정부 뒤에 숨은 ‘거대한 손’이었다.

정보 통제라는 권력의 속성만큼은 양국이 빼닮았다. 박정희 정권은 한-일 협정이 조인되기도 전인 1965년 3월 불과 200쪽 분량의 백서를 발간했다. 국내 한-일 협정 반대를 무마할 목적으로 성과는 부풀리고 과오는 감추었다. 일본도 방대한 기록을 만들었지만 중요 내용엔 자물쇠를 채웠다. 2005년 결성된 ‘일한 회담 문서 전면 공개를 요구하는 모임’의 소송을 통해 공개된 기록 중 일부(6만여 장의 외교문서 중 원문 4636장에 해당)를 모아 한국 학자가 재구성한 것이 이 책이다.

2015년 위안부 협상을 종결지으며 양국이 박아넣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 문구는 50년 전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음을 확인”(일본국과 대한민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제2조 1항)했다는 표현에 그 원형이 있다. 정치 스타일이 닮은 부녀는 언어까지 꼭 닮았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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