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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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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안녕합니다 그대도 안녕합니까?

지난 시대를 돌아보는 형식으로 자리잡은 <응답하라> 시리즈… 정답던 옛 동산 추억하는 자리에 초대받지 못한 기억들, 사람들
등록 2015-12-10 23:35 수정 2020-05-03 04:28
tvN 제공

tvN 제공

어차피 살아남은 자들의 추억이다.

tvN 에서 44살 덕선(이미연)은 소파에 앉아서 18살 덕선(혜리)을 회상한다. 그녀는 아파트 소파에 앉아서 말하고, 우리는 거실 소파에 앉거나 누워서 본다. tvN의 시리즈는 그런 드라마다. 작심하고 보지 않아도 보기 시작하면 벗어나기 힘들다. 흐물흐물 웃음을 머금고 보다가 끝내는 한 방울 눈물도 떨구는, 황금비율의 오락이 ‘킬링타임’을 아깝지 않게 한다. 캐릭터의 성격과 관계만 적당히 알면 어디서 끼어들어 보아도 즐기기 어렵지 않다. 더구나 덕선의 한 살 아래 동생 노을(최성원)이와 동갑인 아저씨에게 은 한번 펼쳐보기 시작하면 덮기 어려운 앨범 같았다. 어느 주말, 소파에 ‘안겨’ 을 보다 청춘의 시가 떠올랐다. ‘비참할 정도로 나는 편하다’는 구절이 무슨 뜻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던 황지우 시인의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다.

완벽한 공동체, 쌍문동 골목
<응답하라 1988>은 서울 쌍문동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동갑내기 남자 넷과 여자 하나의 이야기를 축으로 진행된다. 이들을 둘러싼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tvN 제공

<응답하라 1988>은 서울 쌍문동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동갑내기 남자 넷과 여자 하나의 이야기를 축으로 진행된다. 이들을 둘러싼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tv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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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매회 드라마의 끝에는 ‘특공대’(특별히 공부 못하는 대가리)라는 소리를 들으며 쌍문여고에서 999등을 하던 덕선이가 말끔한 중산층이 되어 소파에 앉아서 말한다. 아직은 등장인물 누구의 23년 뒤인지 모르는 남편 김주혁도 옆에서 티격태격한다. 덕선을 지켜보는 우리는 편안하다. 과 에서 여주인공들이 변호사, 의사와 결혼한 것처럼 덕선이 남편도 번듯한 직업을 가졌을 것이란 기시감이 있다.

시리즈는 과연 ‘남자친구들 가운데 누가 남편이 됐을까’를 맞추는 과정인데, 매번 시리즈는 그 시절의 친구들이 모이는 모임으로 끝났다. 친구들 가운데 늦게 오는 누군가는 있을지언정, 오지 않는 친구는 없었다. 그렇게 을 보면서도 우리는 오늘의 테이블에 초대받지 못한 친구는 없을 것이라고 안도한다. 예뻐지고 넉넉하게 사는 것 같은 덕선이의 일상에도 안심한다.

이렇게 시리즈에는 탈락한 자들이 없다. 변두리에서 시작한 우리가 어떻게 ‘손에 손잡고’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세상을 넘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이다. 성실한 사람이 성장할 수 있었던 시절에 관한 ‘보랏빛’ 회고이기도 하다. 착한 이들의 생존기(혹은 성공담)에 탈락한 자가 나오지 않으므로 드라마를 보는 이들은 한없이 편안하다.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 봉황당 골목, 드라마 속 그리운 공동체가 있었던 곳이다. 시리즈는 결국 시원에 관한 얘긴데, 이번엔 무대가 서울 변두리다. 이곳은 끝없이 반찬을 나누듯 넉넉한 집이 어려운 이웃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나누는 동네다. 아픈 곳을 아프게 찌르는 야박한 이웃은 없다. 서로의 안부를 걱정하는 이들로 가득한 동네는 마치 영화 의 한국전쟁 당시 고립된 산골 같다. 진공의 공간이다. 드라마는 “영웅 아니라 영웅 할배라도 돌아갈 곳은 결국 가족”이라고 선언하는데, 여기서 이웃은 가족의 확장에 다름이 아니다. 흔히 이웃 간 시기로 드러나는 사회적 경쟁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은 가족이 이웃으로 확장된 진정한 가족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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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가 세상의 풍파를 막는 울타리가 된다. 아프게 사라지는 이는 없다. 조금 없거나 풍족한 차이는 있지만, 이것은 ‘아랫집 윗집’ 정도의 차이다. ‘급’이 다른 차이는 아니다. 반지하 아랫집에 세들어 사는 덕선이는 윗집에 사는 주인집 아들 정환(류준열)에게 조금도 기죽지 않는다. 소꼽친구니까, 오랜 이웃이니까 그렇다. 1억원 올림픽 복권에 당첨돼 ‘졸부’가 된 정환이 가족의 풍요는 능력의 결과가 아니라 단지 운으로 그려진다. 탈락한 인물이 나오지 않는 것의 거울처럼 성공한 사람의 능력도 찬양되지 않는다.

시리즈에는 개천에서 용 나던 때의 인물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의 벤처기업가가 그랬고, 에서는 천재 바둑기사 최택(박보검)이 그렇다. 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성공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예전처럼 살아간다. 부자인 정환이네는 이웃에게 끝없는 ‘무상 분배’를 실천한다. 3만원, 당시에 요긴한 돈으로 나오는 생활비를 반지하에 사는 덕선이 엄마와 남편을 잃은 선우(고경표) 엄마가 자주 빌려가지만,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는다.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관계는 아니어서, 이웃들은 시도 때도 없이 음식을 나눈다.

는 정주영 고 현대그룹 회장의 자서전 제목이다. 이것을 빌리면, 은 고생은 했지만 실패는 하지 않았던 이들의 얘기다. 변두리 동네지만 극한의 빈곤은 없다. 은행에 다니는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서 반지하를 벗어나지 못하는 덕선의 집안은 어렵지만 빈곤하진 않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선우의 집에는 아버지를 대신하는 믿음직한 미래인 아들이 있다. 호시탐탐 지켜주는 이웃도 있다. 극복될 여지가 있는 가난은 낭만화될 여지도 있다. 박정희식 개발 신화를 내면화하지 않아도, 지난 세기 한국인은 가난이 극복될 것이란 ‘건강한’ 희망으로 살아왔다. 실제로 가난을 극복한 경험도 있다. 은 그런 믿음에 충실하다.

위협은 동네 밖에서 온다. 국가권력은 마을의 평화를 위협한다. “과외도 한번 안 하고 서울대에 들어간” 덕선의 언니 보라(류혜영)는 운동권이 된다. 당시 민정당사 점거농성을 했던 보라를 체포하러 경찰들이 동네에 들이닥친다. 보라는 저항하지만, 자신을 찾으러 동네를 헤매다 핏물이 든 엄마의 양말을 보고서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라고 말한다. 보라의 말은 투항이 아니라 엄마를 향한 자백으로 들린다. 외부 세력에게 ‘미안하다’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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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했지만 실패하진 않았다

마을 바깥의 야박한 심성도 있다. 오랜만에 찾아온 선우의 친할머니는 혼자 사는 며느리에게 모진 말을 퍼붓는다. 오히려 확장된 가족인 이웃이 이들을 감싼다.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 속에서 오직 가족만이 유일한 안전판이 된 사회를 이 응시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살다보면 한바탕 시련이 닥치지만, 삶이 고꾸라지는 불행은 닥치지 않는다. 회복되지 않는 상처는 없다고, 은 말한다. 언제나 시련이 끝나면 깔리는 노래 “걱정하지 말아요, 그대~”와 함께.

자주 다음회 예고편은 심각한 사건이 터질 것처럼 보인다. ‘악마의 편집’이라고 비난할 정도는 아니지만, 막상 다음편을 보면 슬쩍 김이 빠진다. 항상 사건은 극한의 위험을 암시하다 다행스럽게 끝난다. 보라는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지만 훈방된다. 엄혹한 시절에 어떻게 심각한 상황으로 가지 않았는지 설명이 충분치 않다. 그냥 드라마의 정서로 이해된다. 이것이 시리즈의 룰이다. 심장병이 있는 정봉(안재홍)이가 생명이 위태로울지 모른다는 복선을 깔고 수술을 받지만, 결국 허무한 복선이 된다.

회복되지 않는 상처는 없다
‘나도 몰랐던 나의 첫사랑’은 <응답하라 1997(오른쪽)>, <응답하라 1994>로 이어진 시리즈의 테마다. tvN 제공

‘나도 몰랐던 나의 첫사랑’은 <응답하라 1997(오른쪽)>, <응답하라 1994>로 이어진 시리즈의 테마다. tvN 제공

국가의 배신도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주지는 않는다. 덕선이는 서울올림픽 개막식 피켓걸로 뽑히지만, 피켓을 들기로 했던 나라 마다가스카르의 불참으로 한여름 땡볕의 수고를 날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덕선이 벌점을 많이 받은 사람의 대타로 우간다 피켓을 드는 것으로 ‘훈훈하게’ 끝난다. 에서 성실은 보답받는다. 지각 한번 하지 않고 연습에 임했던 덕선의 태도에 대한 보상인 것이다.

한국의 중산층은 국가권력 앞에서 분열한다. 권력 탓에 위기를 겪었지만, 수혜를 입은 경험도 있다. 한국 사회에 대한 중산층적 회고 방식인 시리즈의 저변에는 이런 갈등이 깔려 있다. 요컨대 은 열심히 노력해 시련을 통과한 이들의 기억이다. 드라마를 보면 다들 무사해서 편안하다.

그러나 드라마 바깥에는 경쟁사회에서 탈락한 이들이 겪는 또 다른 현실이 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로 끝난다. 회고담 에는 살아남은 자신에 대한 성찰은 희박하다.

‘헬조선’이 청년의 현실이라면, ‘성공한 기억’은 한국인의 정서다. 지난 반세기, 지구촌에서 예외적으로 성공한 사회의 일원으로 한국인을 이해하지 않으면, 사회를 바꾸기도 어렵다. 성공한 기억의 극보수 버전은 하나가 아니다. 선한 중산층의 방식도 있다. 의 회고 방식은 박정희식 개발독재 미화가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박원순식 마을 만들기와 통한다. 이웃의 호혜로, 마을의 부조로 만드는 마을을 대안으로 여기는 것이다. 마을이 아이를 키운다. 서울시 정책의 일부다. 또한 에서 동네는 마음에 품었던 사람과 ‘마니또’가 되는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다.

시리즈는 ‘나도 몰랐던 나의 첫사랑’을 테마로 한다. ‘남자친구 중 누가 남편일까’는 시리즈를 연결하는 구조다. 에서 여주인공은 내가 첫사랑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라 나를 남몰래 사랑해온 사람과 결혼했다. 에서도 새로운 친구인 칠봉이가 아니라 오래된 관계인 쓰레기가 선택됐다.

‘우리가 몰랐던 우리의 첫사랑’, 그것이 시리즈가 생각하는 관계의 핵심이다. 보이지 않는 울타리인 가족처럼, 여기까지 무사히 오기까지 누가 나를 지켜주었나 하는 것이 중요하다. 에서 지금까지, 덕선에게 우산을 씌워준 사람은 정환이었고 보라에게 우산을 건넨 사람은 선우였다. 그렇게 남자가 결정하고 여자는 선택한다. 오래된 미래의 발견이 성장의 과정이라고 시리즈는 말한다.

결국은 세월에 대한 얘기로

이렇게 연애담의 외피를 쓰지만, 결국 시리즈는 점점 세월에 대한 얘기로 바뀌고 있다. 처럼 점점 먼 시대로 갈수록 세월이 사랑을 이긴다. 에서 드라마의 정서를 대변하는 노래는 와 더불어 김필과 김창완이 다시 부른 이다. “나를 두고 간 님은 용서하겠지만/ 날 버리고 가는 세월이야/ 정 둘 곳 없어라 허전한 마음은/ 정답던 옛 동산 찾는가.” 이제는 없는 혹은 원래도 없었던 ‘옛 동산’을 찾는 에 한국인은 10%의 시청률로 응답한다. 시절이 각박할수록 추억은 달콤하기 십상이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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