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아버지는 정치적으로 보수적 성향을 지니고 계셨다. 아버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미국에서 유학 중인 나에게 전화로 말씀하셨다. “한국에 돌아오지 마라. 여기에는 이제 희망이 없다.”
그렇다면 보수적인 아버지의 전쟁관은 어땠는가? 대학에 막 입학한 어느 날 나는 미군의 양민 학살을 다룬 역사적 자료를 접한 뒤 충격을 받고 아버지에게 그런 일을 아시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미군은 그런 적이 없다고 거의 확언을 하셨다. 나는 아버지에게 자료를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그것은 날조된 것이라며 격분하셨고 나는 분명한 사실이라고 반발했다. 그날의 언쟁이 둘 사이에 남긴 감정적 골은 꽤 심각해서 한동안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앞의 이야기가 다가 아니다. 아버지는 언제부턴가 한국전쟁이라는 역사 속으로 파고드셨다. 아버지는 독학으로 한국전쟁에 대한 지식을 쌓아나갔다. 늘 보수정당에 투표를 했지만 한국전쟁에 관한 아버지의 입장은 단순치 않았다. 아버지는 한국전쟁은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됐지만 당시의 국내외 정세를 언급하시며 폭넓은 맥락에서 전쟁의 원인을 따져봐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지닌 전쟁에 관한 지식이 나보다 훨씬 해박했을뿐더러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보수파였지만 내가 신입생 때 언쟁을 벌였던 분과는 사뭇 거리가 있었다.
아버지는 역사책들을 두루 읽으며 어린 시절 겪은 전쟁을 역사로, 개인의 비극을 포함하면서 넘어서는 큰 이야기로 다시 이해하셨다. 사실 지금 내 방의 책장에 있는 한국전쟁과 근현대 한국사에 대한 책은 전부 아버지의 것들이다.
그중에 책 제목 하나가 눈에 띄어 꺼내보았다. 정병준이라는 역사학자가 저술한 이라는 책이다. 지금껏 한 번도 들춰보지 않은 책이라 내용을 훑어보니 38선에서의 잦은 남북 간 군사적 충돌이 남침의 도화선이 됐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저자는 김대중 정부 시절 국사편찬위원회에 몸을 담았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지지하는 이들이 타깃으로 삼을 표본이라 해도 무방해 보였다.
나는 궁금해졌다. 노무현 정부에 치를 떨었던 아버지의 서재에 왜 ‘좌파’로 낙인찍힐 법한 역사학자의 책이 꽂혀 있는가? 머리말을 읽어보니 마치 하나의 힌트처럼 이런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 장들을 완성하던 지난 몇 달간… 한국인들이 겪었던 역사적 상황 속에서 덧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사람들의 꿈과 열정이 생각나 불면의 밤을 지새워야 했다. 1950년에 형상화된 한국이라는 국가, 사회, 사람들의 비극을 통해 이 책이 21세기 우리들에게 이야기하는 바가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우린 모두 전쟁 비극의 생존자좌파이건 우파이건, 보수 아버지건 진보 자식이건, 전쟁에 관해서는 하나의 공통분모가 있다. 그것은 모두 전쟁이라는 비극의 생존자라는 사실이다. 아버지가 가까스로 살아남았으니 자식도 가까스로 태어난 셈이다.
이 비극을 일으킨 원인은 무엇인가? 타도해야 할 원수인가? 아니면 과거 속의 진실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원수에 대한 승리욕을 고취하고 승리의 전리품을 과시하는 것인가? 아니면 과거 속의 진실이 무엇인지, 나의 현존이 과거의 비극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성찰하는 것인가?
보수적인 아버지조차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알고 계셨으리라. 그래서 나는 애틋하게 상상해본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작금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에 대해서 나와 아버지는 어쩌면 꽤 근사한 토론을 해볼 수 있었을 터이다.
심보선 시인·사회학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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