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부모님한테 화가 나 있구나….’ 다케시마 나미가 그린 만화 에서 순하고 착한 딸이었던 여주인공은 엄마가 되고 나서 왜 나는 딸한테 자꾸 화를 내는지 생각하다가 문득 깨닫는다. 아이한테도 화가 날 수는 있다. 그런데 아이가 잘못한 것 이상으로 화를 내는 이유는 뭘까. 이미 내 안에 분노가 상당히 채워진 양동이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어찌저찌해서 이 분노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찰랑거리며 살아왔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고 이런저런 요구를 퍼부으면 분노의 양동이는 갑자기 흘러넘친다. 원래 가진 분노 때문에 아이한테 무지막지한 분노를 퍼붓게 된다. 분노의 양동이를 비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나와 가장 가까이에 있으며 약하고 방어력 부족한 아이는 매일 내 분노에 젖게 된다.
내가 정확히 누구한테 분노하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만으로도 분노 에너지는 반으로 줄어든다고 한다. 에선 여주인공이 부모님께 하고 싶었던 말을 했는데도 양동이 바닥에 뭔가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건 내 마음이 아냐. 엄마에 대한 아빠의 분노, 아빠에 대한 엄마의 분노.” 아이는 얼마나 수용하는 존재인가. 부모가 가진 분노조차 자신의 분노인 양 간직한다. 내 양동이 밑바닥 묵은 찌꺼기는 엄마가 엄마 자신에 대해 갖는 분노와 혐오였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자연스레 상담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상담을 받고 뭐가 달라졌나요?
상담을 받고 인생이 달라졌나요? 상담이 정말 효과가 있느냐는 질문은 내가 지금 상담을 받는 게 좋을지를 묻는 질문과 함께 상담 경험자로서 가장 많이 받았던 양대 질문이다. 효과라기보다는 변화라고 불러야 한다. 상담 기간에 가장 많이 겪는 변화는 인간관계의 변화다. 상담을 하면 스스로를 불편하게 하는 마음의 습관들이 심하게 걸리적거리기 시작한다. 잠결에 불편한 옷을 벗어던지는 것처럼 자신을 억압하는 요인을 알아차리고 결별하려 한다. 이때 내담자가 감당할 수 없는 결별을 하지 않도록 미리 단속하는 것이 상담자의 주요한 임무다. 예를 들면 상담을 받다가 이혼하거나 부모와 의절했다가 나중에 내담자가 이 때문에 급격히 좌절하고 인생이 꼬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변하기에 관계의 변화는 어쩔 수 없다.
나는 상담 기간에 친구 두 명과 절교했다. 그 때문에 상처도 받고 외로워지기도 했지만, 그때로 돌아가도 또 그랬을 것 같다. 영원한 친교가 없는 것처럼 영원한 절교도 없다. 화를 내도 괜찮다는 경험을 해본 일이 없는 사람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화내는 것을 두려워한다. 화를 내더라도 자신을 위해선 화내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공공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만 분노하기도 한다. 나는 무례한 사람을 만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해도 반나절은 지나서야 내가 지금 몹시 화가 난다는 것을 알아차릴 만큼 둔감했다. 화내고 싶지 않아서 공격성과 분노를 안으로 키웠다. 공격성을 숨기고 스스로를 착한 피해자로 만드는 나만의 처세가 있었다. 나의 상담자는 내가 화내도록 여러 차례 독려했고 한 친구와 대판 싸웠을 때 칭찬도 했다. 어느 날 나는 상담일기에 ‘모든 것은 내가 벌인 일이며,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한다’고 적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되도록 해야 한다. 자기 주도성을 찾아와야 한다.
“성공적으로 상담을 마친 뒤에도 늘 어딘지 부자연스러운 사람들이 많다.” 독일 뇌과학자 에른스트 푀펠의 이 말은 두 가지 점에서 진리다. 하나는 상담의 목표는 인격 변화나 인간성 함양이 아니라 애착, 기쁨, 우울, 분노 같은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처리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나마도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꿈속의 오래된 어두운 집주변을 편안하게 할 만큼 착해지긴커녕 툭하면 화를 낸다. 심하면 절교를 일삼는 경우도 있다. 바로 화내고 파르르 떨기 때문에 본인만 뒤끝이 없다. 갱년기 장애나 사춘기병이 아니라 상담 뒤 찾아온 변화다. 나는 상대방의 기분도 생각지 않고 내 감정을 표현하기에만 주력하던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친 뒤 어린아이처럼 관계에 대해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치유에 대한 책들을 보면 훨씬 극적이고 긍정적인 이야기가 많지만 나는 그 책들은 대부분 치료자가 썼기 때문에 그러한 서사가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의사는 치료를 말하지만 환자는 고통과 동반하는 삶을 생각한다. 상담 이후 분노도 불안도 여전했지만 자연스럽게 화내고 불안을 다룰 줄 알게 됐다는 것이 내담자의 입장에서 본 상담의 효과다.
전혀 접근하지 못했던 과제도 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몇 달마다 한두 번씩 꼭 꾸는 꿈이 있다. 꿈속엔 항상 오래된 어두운 집이 나오는데 나는 한 번도 그 집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 집만 생각하면 깨서도 몸서리를 쳤다. 거기엔 무서운 것이 있었다. 기독교 중에서도 신비주의적 성향이 강한 집안의 영향으로 어릴 때 늘상 가위눌리고, 무서워 떨면서 자랐다. 상담을 시작하면서 내 안의 심연, 괴물 같은 것을 만나게 될까 두려웠다. 아마도 그 집 안에 있는 무엇이리라. 상담실에선 어떤 신비주의적 체험도 없었지만 상담을 계속하면서 그 집의 크기는 마침내 작아지고 작아져서 어느 날인가 나는 장난감 상자만큼 줄어든 그 집의 문을 굳게 걸어잠그는 꿈을 꾸었다. 그 집은 내 안에 여전하지만 눌리거나 쫓기지 않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담하던 날 상담자가 그 집 이야기를 꺼냈다. 그 집의 정체가 무엇인지 깊이 다뤄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점이 가장 아쉽다고 했다. 내가 그 집의 창문을 열고 집 안에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보는 데까지 나아가길 바랐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영적인 것에 대해 나와 같은 무게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 놀라웠다. 우리는 그저 평안과 자유를 얻기 위해 마음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는가. 나는 대체 내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고 싶어서 상담실을 찾았다.
정신분석으로 해석하지 못한 것불교도이던 미국의 심리학자 모건 스콧 펙은 을 쓰면서 기독교인으로 개종한다. 이 책에서 그는 사람을 밝은 빛으로 이끄는 선한 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은 어조로 악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내 마음속 어떤 부분은 정신분석의 힘을 빌려 설명했지만 그러지 못한 부분이 훨씬 더 많다고 믿는다. 이것을 영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에 이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이번에는 프로이트의 의자에 앉았지만 다음에는 다른 길을 통해 그 어둡고 무서운 집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N기자 *‘너의 목소리가 들려’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수고해주신 N 기자와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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