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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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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군가를 실망시키는 사람”

무슨 이득이 있어서 우리는 자멸하는 드라마를 완성하는가
등록 2015-07-30 20:27 수정 2020-05-03 04:28

“우리는 이야기하는 마음이 만든 위대한 걸작이다. 우리가 만들어낸 상상의 산물인 것이다.” 책 (조너선 갓셜)에선 사람들이 모두 저마다 기억과 환상 등을 동원해 자신에 대한 각색된 서사를 갖는다고 했다. 서사는 그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이야기며 그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일관된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인생을 바치고 최선을 다한다.

<마이 매드 팻 다이어리> 화면 갈무리

<마이 매드 팻 다이어리> 화면 갈무리

공격성을 정당화하는 방법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분노하는 김아무개씨’가 있다. 처음에 나는 이 사람의 날카로운 ‘정의 감수성’이 참 좋았다. 예를 들면 조직에서 내분이 생겨 누가 잘했다 잘못했다 판단하기가 애매했을 때 그는 용케 윗대가리의 책임을 칼같이 찾아내고는 했다. 부도덕한 위정자와 무능한 경영자, 무책임한 남편들을 욕하는 현란한 분노의 샤우팅으로 모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그런데 듣다보면 이야기의 구조가 대체로 비슷했다. 언제나 한결같이 비정규직, 여성 같은 소수자들을 대신해 분노 시동을 걸고 자신도 비슷하게 차별받거나 억울했던 이야기가 더해지더니 이 문제에 책임 있는 모두를 욕하는 줄거리다. 나는 점점 이 땅의 소수자와 자신을 엮는 그의 이야기를 듣기가 불편해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분노는 공격성의 한 표현이다. 자신을 서운하게 한 사람들을 공격하고 싶을 때 자신을 깨어 있는 사람, 소수와 연대하는 사람으로 설정하면 자신의 분노는 자연스레 정당화된다. 그의 인정 욕구와 공격성은 ‘거룩한 분노’로 스토리텔링되었던 것이다.

한편으론 ‘늘 배신당하는 이아무개씨’도 있다. 그는 연애를 여러 번 했는데 이상하게도 멀쩡해 보였던 남자도 이아무개씨와 사귀다보면 놈팽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거나 아니면 놈팽이가 돼버렸다. 완벽한 이아무개씨에게 단 하나, 남자 보는 눈만 없는 줄 알았다. 그는 늘 몸을 낮추며 사랑을 시작했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에게 막무가내로 친절했다. 절대로 남자가 밥값을 내지 못하게 하며 그의 논문을 위해 대신 지방에 다녀오고 남자 가족에게도 봉사했다.

이아무개씨 연애에서 가장 독특한 점은 그가 이 모든 일을 자신이 그 남자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 남자는 훌륭한 사람이거나 불쌍한 사람이거나 자신에게 정말 잘해줬다는 등등의 이유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아무개씨의 친절에 길들여진 남자들은 이아무개씨에게 보증을 세워놓고 도망가거나 바람을 피우거나 하면서 그를 떠났다. 성격 차이 같은 평범한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이아무개씨의 애인들은 왜 하나같이 나쁜 남자가 되어 이아무개씨를 배신했을까? 이아무개씨는 자신이 배신당하는 드라마를 위해 가끔은 정말 나쁜 남자를 고르기도 하고, 배신자 기질이 부족한 남자를 만났을 때는 최대한 그 남자한테 잘해준 다음 차일 때까지 정떨어질 만한 행동을 거듭하기도 했다. 옆에서 지켜보면서, 헌신하는 이아무개씨야말로 진정한 나르시시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정말 관심 있는 것은 자신이 배신당하는 드라마를 완성하는 일이지, 상대 남자가 아닌 것 같았다.

서사를 만들고 유지하려 애쓰는 이유는 심리적 보상이 있기 때문이다. 김아무개씨처럼 분노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경우는 그렇다 쳐도 이아무개씨처럼 자멸하는 드라마를 위해 노력하는 이유는 또 뭘까? 미국 정신분석의 존 먼더 로스는 라는 책에서 자기학대의 서사는 근본적으로 과거 집착에서 나온다고 지적했다. 폭력을 당했던 사람들은 맞을 만해서 맞았다고 세뇌당했기 때문에 죄책감까지 짊어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 자기를 학대하게 하면 자신이 벌을 받는 거니까 잠시나마 죄의식을 덜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학대하는 악역을 떠넘김으로써 그 사람의 품위와 도덕성을 깎아내렸으니 복수도 한 셈이다. 이때 복수하려는 대상은 자신을 불안하게 하거나 상처 입혔던 과거의 부모다. 지금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은 부모의 대리역에 불과하다. 어린 시절 폭력 앞에서 좌절하고 두려워한 경험을 한 이들은 이렇듯 즐겨 자학의 서사를 택한다.

죄책감 덜고 누군가에게 악역을 맡기고

이렇게 이야기하면 불공평할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상처 입고 학대당한 피해자를 두고 네가 지금도 당하고 산다면 그건 너 자신 때문이라며 원인을 피해자 탓으로 돌리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이해하기론 심리상담과 치유는 자기주도성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엉킨 실타래를 풀어서 어디서부터 내가 시작했고, 내가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시점은 언제였는지 처음의 실끝을 찾는 일이다. 남에게서 답을 찾으려 들면 그 상담은 결코 종결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이 처음엔 내게 호감과 기대를 갖다가 곧 실망해서 나를 떠나리라는 ‘실망의 서사’를 갖고 있었다. 이 서사를 기승전결 잘 갖춰 제대로 상연하기 위해 인생 곳곳에서 항상 최선을 다했다. 친구가 생기면 간도 쓸개도 빼주며 공을 들이고 가족만큼이나 가까워졌다 싶으면 그를 멀리하거나 실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언제부터 자신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가졌던 걸까. 실끝을 찾기 위해 유년기, 유아기, 항문기, 구강기로 무한 퇴행할 필요는 없었다. 우선 청년기 이후에 있었던 일들이 짚였다. 우리 어머니는 애지중지 키운 아들과 딸들 중 단 한 명도 어머니 마음에 흡족하게 자리잡지 못하자 자식들에게 오랜 시간 원망과 분노를 발사해왔는데, 그게 내게 얼룩지고 내면화된 결과가 “나는 사랑하는 누군가를 실망시키는 사람”이라는 서사가 됐다.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내 정체성으로 삼은 것도 문제지만 그중에서도 왜 하필 배은망덕한 자식이길 택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어머니로부터 가장 먼 거리에 있을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실망스러운 자식’이라는 정체성은 어려서부터 집안의 지나친 기대와 칭찬에 눌려서 어른들이 내 참모습을 알고 나를 싫어할까봐 조마조마하며 컸던 탓도 있다. 누군가 내 속을 들여다보곤 내게 실망할까봐 인간관계에서 거리를 두는 습관은 그때부터 시작된 거였다.

남이 만들어준 서사를 깨고

남이 만들어준 서사를 깨고 자신이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과정은 중요하다. 조너선 갓셜은 “우울증은 자신에 대한 부적절한 서사 때문에 생기며 심리학자들이 할 일은 불행한 사람들이 지닌 자신의 삶에 대한 불행한 이야기를 바로잡아 감당할 수 있는 이야기로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경험해보니 내 서사에서 환상을 걷어내는 그 과정은 중독에서 벗어나는 과정과도 비슷했다. 술과 담배를 끊고 나면 이것들 없이 견뎌야 하는 인생이 더없이 공허하고 남루해 보이기까지 한다.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자기도취나 자기비하에 취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

N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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