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의자’를 찾아갔다. 계기가 있었다. 2년도 더 된 일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검찰청에서 일하는 수사관을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그때 나는 TV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어떤 유명인의 비리를 제보받고 폭로 기사를 준비 중이었다. 지방까지 내려가서 피해자와 주변인들을 인터뷰했다. 앞뒤 연결고리는 맞춰졌는데 물증이 없었다. 고심 끝에 법원 출입 기자에게 친한 선배라는 수사관을 소개받았다. 검찰이 수사에 나선다면 합법적으로 증거를 확보하고 기사를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수사관을 만난 순간부터 나는 그 사람과 멀리 떨어져 앉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야기가 잘될 리 없었다. 빈손으로 돌아서는데 갑자기 눈물이 치솟았다.
내가 가져간 제보가 검찰이 수사할 만한 사건이 되느냐를 판단하는 자리에서 그 수사관이 제보의 내용이 아니라 나를 평가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불안했다. 우리 어머니가 내게 항상 그랬듯 말이다. 무의식에서 쌓이고 뭉쳐졌던 생각이 그날 의식적 영역으로 공처럼 튀어올라 업무상 애써 유지했던 평정한 태도를 박살냈다. 중요한 자리만 가면 항상 내 인격, 내 태도, 나란 인간이 총체적으로 심판받는다는 중압감에 시달리는 게 정상인가?
마흔 살도 넘어 이제는 자신이 돌봐야 할 아이도 있는 여자가 엄마한테 혼나고 집에서 쫓겨나온 아이처럼 백주대낮에 길거리에서 꺼이꺼이 울었다. 2주쯤 뒤 나는 한 상담실에 앉아 처음 만난 낯선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렇게 시작한 상담이 2년 동안 이어졌다.
심리치유는 이 시대의 신흥종교다. 치유 과정 때문이 아니라 치유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심리상태가 그렇다. 나는 2년 동안 온갖 푸닥거리를 다 해봤다. 상담받는 틈틈이 심리진단을 받았으며, 최면요법에 빠졌다가 그 인연으로 최면의학회에 참가해보기도 했다. 꿈 분석을 받기도 하고, 무대공포증을 가진 사람들과 모임도 하고, 심지어 부동산 개발사와 이름이 비슷한 어느 집단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해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내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소리 높여 외치기도 했다. 노력중독자였던 나는 무력한 자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 말고는 길을 몰랐다.
‘프로이트의 의자’는 자신의 정신적 환경을 성찰하는 공간이다. 프로이트는 초기에 했던 최면치료 요법을 중단한 뒤에도 최면 때 사용하던 긴 의자를 상담실에 그대로 두었다. 긴 의자에 눕듯이 기댄 내담자는 자연스레 의사 얼굴을 보지 않은 채 자신에게 집중하게 된다. 스승에게서 제자로 전수돼온 정신분석에서 상담실 환경은 얼추 비슷하다. 의자를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라거나, 환자가 눈물콧물 쏙 뺄 때를 대비해 어디에 화장지를 두라고까지 세세히 지정돼 있다. 내가 찾은 상담실에선 상담자와 내담자가 마주 앉았다. 그런데도 내 문제를 털어놓기에 숨이 가빠 남의 말이 들리지 않았던 나는 6개월이 지나서야 내가 지금 정신분석을 받는 게 아니라 ‘역동적 심리상담’이라고 부르는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앉아 있는 것이 정통 프로이트의 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지만 상담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나의 상담자는 개인의 심연에 빠지려는 나를 여러 번 건져서 내가 처한 사회적 환경을 둘러보게 했다. 가부장적인 엄마 밑에서 자란 딸이면서 일하는 엄마인 여성 노동자에게, 억압은 유년기에 부모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날마다 더해지는 것이었다. 어느 쪽이 더 내 목을 졸랐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딸의 응석을 받아주며 째려본 엄마의 등상담실에서 처음 꺼낸 말이 아마 “우리 딸은 채권자 같아요”였을 것이다. 이어서 “우리 엄마도 저한테 빚을 갚으래요” 그랬던 것 같다. 어머니의 희생에 제대로 보답하지 못했고 그래서 늘 나를 원망하고 꾸짖는 어머니의 자리가 마음을 무겁게 했다. 상담을 결심했던 날처럼 나를 판단하고 꾸짖는 어머니의 이미지는 수시로 내 일상을 가로막았다. 철들면서부터 마음 깊은 곳에서 어머니를 미워하고 피해왔다. 후레자식 중에서도 상후레자식이었던 내가 딸을 낳았을 땐 난감했다. 딸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내 딸은 나를 미워하지 않기를.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아이를 키우는 엄마를 ‘육아 독립군’이라고 한다. 나는 항상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던 주제에 ‘육아 연합군’ 내의 갈등과 분열까지 일으키곤 했다. 아이가 다섯 살쯤 되었을 때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다 갈라서고 친정어머니와 살게 됐다. 내 아이는 1시간마다 전화를 걸어서 “엄마 언제 들어오냐”고 묻는 걸로 갑자기 주 양육자와 떨어진 자신의 불안하고 외로운 마음을 드러냈다. 날이 갈수록 굽어가는 친정어머니의 등을 볼 때마다 미안하거나 안쓰러운 마음보다는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게 문제였다. 시어머니나 남편과 불화가 있을 때 우리 엄마는 단 한 번도 내 편을 들지 않았다. 딸이 어떤 구박을 받아도 “시댁과 남편은 신성왕국”이라는 엄마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죽으면 썩어 없어질 몸뚱이 그렇게 아껴서 뭐하냐”고 나를 구박했을 땐 엄마도 우리가 고부관계인지 모녀관계인지 헷갈렸던 게 틀림없다. 하나에서 열까지 엄마가 해달라고 요구하는 딸의 응석을 받아주면서 늘 나는 엄마의 등을 째려봤다. 보고 있나, 엄마? 나는 내 문제뿐만 아니라 툭하면 엄마에 대한 분노와 아이에 대한 걱정을 토로하며 모녀 삼대를 상담실에 끌어들이곤 했다.
내가 아이를 키우며 일하는 엄마가 아니었다면 그 의자를 찾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울증은 진단과 처방이 명확한 병이다. 식이장애나 수면장애, 무력감 등이 일상생활을 지속할 수 없을 정도로 일정 기간 지속되는 상태를 말한다. 가끔 내가 우울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곤 했다. 투병을 마쳤지만 애초 미병 상태였으므로 뚜렷한 호전에 대해서도 보고할 것이 없다. 그러나 회사에선 경쟁에 짓눌리고, 집에선 아이와 가족에게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는 가책에 시달리다 가족이 채권단으로 보이기도 하는 일하는 엄마들에게서 나와 비슷한 보편적 우울을 발견하곤 한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말할 친구 한 사람만 있었어도 정신과에 갈 일은 없을 거야.” 20년 전 나온 공지영의 소설 에서 한 친구가 우울증으로 자살을 택하자 남아 있는 친구들은 미리 들어주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그렇게 말했다. 지금 우울감, 무기력감, 죄책감, 불안을 짊어진 엄마라는 이름의 ‘유사 우울 환우’들은 진정한 친구 한 명만으론 이 시절을 견뎌낼 수가 없다. 자기 속으로 한없이 침잠했던 2년 동안 가끔 친구들의 손을 잡기도 했지만 내가 어떤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는지 깨달으면서 다시 밖으로 눈을 돌릴 여력이 생겼다. 정말이지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는 온 세상의 도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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