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을 털어놓기가 어려워 오랫동안 아이 이야기를 했다. 아이에 대한 근심, 자랑, 분노는 사실 거의 내 이야기였다. 자신에 대해 뭔가 말하고 싶을 때 아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얼마나 편리한 방법인가. 자신을 감추고 싶은 저항과 방어기제의 감시를 피해 몰래 밖으로 자신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렇게 던진 메시지가 쌓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게 되니까 진실하진 않지만 실용적인 간접화법이다.
장례식에 올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서꿈은 마치 내가 낳은 아이와도 같았다. 상담을 받으면서 처음엔 어디까지 상담자에게 이야기해야 할지 난감했다. 꿈의 신화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꿈을 정신의 배설 작용, 잉여들의 쓰레기 더미로 부르기도 한다. 허섭스레기 같은 꿈을 남에게 말하는 게 배설과 뭐가 다른가. 그러나 어떤 꿈은 마음에 깊이 남아 있어 결국 상담실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고야 만다. 상담기간 2년 동안 몇 번 의미심장한 꿈을 꾸었는데 이 꿈의 의미를 찾는 과정은 내 상담에서 진전이 있었던 중요한 대목이다.
“꿈은 모든 바라는 것들의 표상이다.” 프로이트는 이 유명한 명제 뒤에 몇 가지 사례를 덧붙여뒀는데 그중 하나는 오랫동안 내 기억에 남아 있다. 프로이트의 한 여성 환자는 어느 날 언니의 하나뿐인 아들이 죽어서 자신이 장례식에 참석하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깬 뒤 이 여자는 죄책감을 느꼈다. 프로이트 이론대로라면 나는 조카가 죽기를 바라는 악한 사람이란 말인가. 프로이트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 여자가 원하는 것은 조카의 죽음이 아니라 예전에 사랑했던 남자를 다시 만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만약 조카가 죽는다면 그 남자는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올 것이다. 게다가 그 여자는 자존심 때문에 그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표현하지 못했다. 자신을 감추기 위해 장례식처럼 아예 애정을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을 택했던 것이다. 프로이트는 꿈 분석으로 사람들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들었고 또 그 때문에 사이비라는 비판을 받았다. 어쨌건 쫓고 쫓기며 찾고 숨기는 이성과 무의식의 숨바꼭질에서 꿈은 항상 중요한 단서를 흘리고 간다는 점만큼은 틀림없다.
그 사람은 수줍고… 나는 수줍고…상담을 받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주 길고 행복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여러 해 전 알고 지냈던 정신분석가를 찾아가고 있었다. 실제로 몇 년 전 함께 책을 쓰기로 하면서 종종 그를 찾아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상황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던 게 꿈속에서 나는 그를 보고 싶은 마음에 몹시 들떠 있었다. 아이도 남편도 내팽개치고 로맨스를 찾아가는 길이라 죄책감도 컸다. 한발 한발 어렵게 나아가고 있는데 집 앞에서 그를 만났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 마중을 나왔다는 것이다. 그는 망설이는 내 손을 잡아끌고 자신의 공간으로 데려갔다. 내가 멈춰설 때마다 뺨을 쓸어주고 어깨를 토닥이며 부드럽게 격려의 말을 속삭였다. 나는 황홀하면서도 비장한 마음으로 그가 사는 집으로 들어갔다. 19금 로맨스 소설에 나올 법한 장면이 막 펼쳐지려는 순간 꿈에서 깼다.
상담자에게 이 꿈을 이야기하기가 몹시 부끄러웠다. 그 무렵 나는 남편과의 불화가 몹시 심해서 내심 다른 사람을 만나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는데 내 꿈이 그런 구차한 속내를 폭로했다는 기분이 들어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그 꿈에서 나온 정신분석가는 몇 년 전에 외국으로 갔다. 실은 나는 그가 한국에 있었으면 내가 상담까지 받을 만큼 정신적으로 피폐해지지는 않았을 거라는 상상을 해본 일이 있다. 나는 꿈에서 그와 못 이룬 연애를 해본 걸까?
내 상담자는 내가 꾼 꿈을 모두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이 꿈을 가장 좋아했던 것 같다. 그 정신분석가가 어떤 사람인지, 그 사람 하면 떠오르는 말을 모두 해보라고 시켰다. “수줍음, 결벽증, 지적 허영, 두꺼비….” 그 다음에 나 자신의 특징을 표현해보라고 했다. 심리적 게임이거나 속임수였는지도 모르지만 수줍음, 결벽증, 지적 허영 등은 모두 나와 완벽히 일치하는 단어였다. 두꺼비는 그 사람의 눈이 툭 튀어나와서 그런 생각을 했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니 어릴 적 내 별명도 두꺼비였다. 상담자의 결론은 꿈속의 정신분석가는 실제 미국으로 간 그 정신분석가가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나의 또 다른 자아가 여러 가지 이유로 정신분석가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무렵 나는 몹시 외로웠다. 온전히 마음을 나눌 사람을 찾다 찾다 결국 상담실을 찾았던 것 같다. 하지만 꿈속에서 내가 그토록 안타깝게 찾던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왈칵 울음이 터졌다. 꿈이 숨기고 싶었던 내 욕망이나 나라는 인간의 밑바닥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꿈속 두 개의 내 자아는 서로를 사랑스럽게 토닥였다. 내 꿈이 드러낸 내 소망은 내 이성과 감성, 아니면 의식과 무의식이 온전히 서로를 긍정하고 통합하는 것이었다.
상담이 좀더 진행되면서 이번엔 끔찍한 꿈을 꾸었다. 꿈에 우리 집에 강도가 들어왔다. 도망갈 길은 없었다. 그가 우리 집에 있던 사람들을 차례대로 죽일 동안 안방에서 담담히 순서를 기다렸다. 마침내 내 차례가 왔다. 다른 사람들처럼 베란다에 엎드리자 그가 칼로 나를 깊이 찔렀다. 옆 사람은 이미 죽었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피의 온도와 비릿한 피 냄새를 맡으면서 천천히 죽어간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도 그 감각이 떠나지 않았고, 내가 무의식 한편으로 가족이 죽길 바라는 것은 아닌가 해서 죄책감이 컸다.
그러나 상담자는 상담받을 때 죽는 꿈을 꾸는 것은 아주 긍정적인 신호라고 했다. 꿈속 인간들은 그림자 인간처럼 내 속의 수많은 상징이다. 그중 몇을 처형하는 과정은 어떤 결심을 의미할 수 있다. 강도를 무서워하지도 않고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인 과정도 이전까지의 부정적 자아를 스스로 떨치려는 상징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현실 속 상담은 가끔 퇴행하면서 느리게 나아갔지만 내 꿈은 계속 희망을 가리키고 있었다.
죽는 꿈이 길조인 이유상담을 끝내기 직전 그 정신분석가가 다시 내 꿈에 나타났다. 미국에서 막 돌아온 그가 우리 집을 찾아왔다. 꿈속 우리 집은 오래된 한옥집이었는데 안방은 시어머니가 불을 환하게 켜놓고 밤새 지키고 있었다. 방 하나에서는 남편이 자고 있었다. 꿈에서 나는 사랑방을 그에게 내주고 바로 그 옆방에서 아이를 끼고 잤다. 나는 원래 내 누추하고 불결한 꿈에 아이가 나타나는 것을 싫어해 아이 나오는 꿈을 거의 꾸지 않았다. 아이가 나오면 억지로 잠을 깨려고 하기도 했다. 마지막 꿈에선 현실에서 만나서는 안 되고 어울리지도 않는 인물들이 모두 한집에 모였지만 더 이상 죄책감이나 부정적인 감정은 없었다. 불완전하지만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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