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두드러지기 시작한 혐오에 관한 분석들이 이어지고 있다. 32호는 ‘혐오의 시대’를 커버로 다루었다. ‘혐오의 시대-2015년, 혐오는 어떻게 문제적 정동(affect)이 되었는가’에서 손희정(여성문화이론연구소)은 87년 체제의 실패와 ‘혐오하는 스놉’의 등장을 설명한다.
스놉이란 말은 헤겔 연구자 코제브의 한 각주에서 시작된다. 그는 ‘포스트 히스토리 시대’의 두 가지 존재 양식으로 ‘미국식 동물’과 ‘일본식 스놉’을 든다. 포드주의적 대량생산 체제에서 소비자는 동물의 모습을 한다. 욕구만을 충족시키며 산다. 존재의 다른 형태인 스놉(속물)은 “주어진 환경을 부정할 실질적인 이유가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형식화된 가치에 입각해 그것을 부정하는 행동 양식”(아즈마 히로키, )이다. 스놉은 동물화되지 않으려 하지만 역사적 발전을 추동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이전 인간의 투쟁과 구별된다. 시인이자 사회학자인 심보선은 “이념의 시대, 운동의 시대, 민주화의 시대가 끝난 후 우리에게 열린 것은 문화적 스노비즘의 시대”()라고 진단했다.
역사의 종말은 1987년 권위주의 체제의 개혁과 함께 찾아왔다. 1990년대 문화운동의 방식은 차이를 차별로 만드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러한 문화운동의 바탕이 되는 인식론은 새롭게 진화하던 자본주의와 만났다. ‘나는 나’는 다품종 소량생산 시대를 견인했다. 개인주의는 전통적 공동체를 탈각시키고 복지제도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복지제도에 대한 불신은 ‘생산력의 가정주부화’를 추진하는 자본주의(여성의 노동을 가치절하 했던 근대 자본주의 논리 그대로 남성과 여성을 가리지 않고 노동 전체를 평가절하하는 신자본주의)와 발맞춘다.
‘혐오하는 스놉’의 바탕은 이렇게 마련되었다. 그렇다면 그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혐오와 수치심, 조리돌림이다. 혐오는 오염에 대한 두려움에서 출발한다(마사 누스바움). 여성과 외국인을 비하할 때 등장하는 냄새나 분비물, 기독교에서의 질병에 관한 표현은 혐오 표현의 대표적 사례다.
이는 수치심을 유발한다. ‘분노’라는 감정은 사회변혁의 가능성을 담지하는 반면 수치심은 자기파괴적이다. 수치심은 디지털 시대 조리돌림을 통해 강화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인정투쟁의 거듭되는 실패와 함께 스놉들이 드디어 동물화되기 시작할 때인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동물화란 코제브의 정의와는 약간 다른데, 스놉이 시도하는 인정투쟁이 (필연적으로) 실패한(하게 되는) 결과물이다. 결론은 암울하다. “‘세월어묵’처럼 상상할 수도 없었던 혐오 표현 속에서 우리는 이미 동물과 대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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