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귀여운 얼굴의 처녀는 그가 사랑한 여인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그런 여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텅 빈 종이에 불과했다. 또다시 연애를 하고 결혼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누구나 한 번쯤 ‘그때 그 사람’을 만났던 시절로 돌아가는 상상을 한다. 놓쳐버린 그가 ‘내 삶의 유일한 단 한 사람’이지 않을까. 다시 돌아가서 잘못된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내용을 담은 소설이 있다. SF는 물론 모든 장르의 작가들이 찬사를 바치는 켄 그림우드의 . 시간여행을 다룬 수많은 작품들이 오마주를 바치는 전설적인 소설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뒤틀려버린 관계, 숨막히는 직장생활을 견디던 제프는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눈을 떠보니 시간을 거슬러 대학 신입생으로 돌아가 있다. 이제까지 살아왔던 기억은 고스란히 간직한 채. 그래서 어떻게 했을까? 역시 돈이 중요하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고 있는 제프는 경마, 야구, 선거 등의 도박과 유망 업종의 주식으로 갑부가 된다. 그리고 과거보다 더 행복한 인생을 꿈꾸며 젊은 아내를 다시 만나러 가지만, 웬걸. 그녀는 ‘변해버린’ 그를 거부하고 도망친다.
여기까지는 예상 가능하다. 문제는 이런 새 삶이 한 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43살이 되면 심장마비로 또 사망하고 18살로 돌아가는 일을 반복한다. 그렇게 매번 무한한 가능성이 주어지지만, ‘순환자’인 그는 행복하기보다 고통스럽다.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해도, 죽음의 끝에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낯선 사람’일 뿐이다.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상대를 다시 마주할 때의 무력함. 사랑하는 이가 내 삶의 전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외로움. 자극적이고 매력적인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채워지지 않는 허탈함. 되돌려진 시간이 해결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 바로 사랑이라니.
그래서 이 불쌍한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제프는 같은 순환자 여인을 만나고, 그녀와 거듭되는 삶을 반복한다. 삶이 재생될 때마다 그녀는 10대이기도 하고, 대학생이기도 하고, 유부녀이기도 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 엄청난 시간을 함께 나누었고, 그 기억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고, 자신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그녀를 대체할 사랑은 없으니까.
사람들은 사랑의 힘을 믿고 싶어 한다. 서로를 완전하게 사랑하는 운명의 상대가 존재하리라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 이번 생에서는 불가능했더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꼭 그런 사랑을 찾기를 기원한다. 그런 소망이 헛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가 보여주는 진실이 있다. 그런 사랑은 상대가 어떤 사람이냐에 달려 있는 게 아니며, 오로지 서로가 공들인 시간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삶이 로또처럼 주어질 일은 없겠지만, 반대로 운명적 사랑의 가능성은 열려 있는 것이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굳이 타임머신이 필요 없다는 것도 위안이 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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