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들 해보세요. 누가 더운 여름에 따뜻한 장갑을 선물한답니까? 그게 어리석은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정작 선물해야 할 수놓은 손수건은 선물하지 못한 맹한 계집애라니까요.”
누군가에게 자꾸 뭔가를 주는 걸 사랑이라고 한다지. 그러니 별별 기념일을 챙기고, 매달 14일을 무슨무슨 날이라고 하는 걸, 뭐라 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주고 싶은 이유, 받고 싶은 이유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하면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이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 쇼핑을 잘 못해서가 아니다. 그 사람의 취향에 딱 맞아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준 것보다 내가 준 걸 가장 마음에 들어해야 하는데, 평생 잊을 수 없는 것이어야 하는데 등등. 자꾸 욕심이 난다. 돈 써서 마련하는 건 나인데 정작 내가 더 애가 닳는다.
13살 제이뚜네도 그랬다. 한 살 위 7학년 라피스가 자신의 주머니에 몰래 가죽띠를 집어넣고 갔을 때, 답례로 무엇을 해야 할지 소녀의 고민은 시작됐다. 사랑도 시작됐다. 풍습에 따르면 수놓은 손수건을 선물해야 했지만 안타깝게도 유행하던 학질에 걸려 제이뚜네는 앓아눕는다. 병이 나았을 때는 소년이 먼 도시로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때를 놓친 손수건 대신 소녀가 준비한 건 털장갑. 제이뚜네는 제 손으로 양털을 다듬고 물레로 실을 뽑고 정성스레 떠서 소년의 트렁크에 몰래 감춘다. 그런데 이런, 어쩌다 마을 사내애들이 이를 알게 되어 온통 놀리는 바람에 정작 소녀는 떠나는 소년을 배웅도 못하게 된다. 더운 여름에 털장갑이라니. 그것도 흰 장갑이라니.
그렇게 첫사랑이 굴욕으로 끝났을까? 여러 해 지나 알게 된 일은 이렇다. “라피스는 그때 기차 좌석표를 구하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손잡이를 잡고 서서 갔습니다. 여름이지만 밤바다 바람이 찼고, 손잡이도 얼음장 같았대요. 그렇지만 그의 손은 얼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눈같이 희고 솜털같이 보드랍고 심장같이 뜨거운, 따뜻한 장갑이 있었으니까요.”
이 어여쁜 소설은 러시아 자치공화국 따따르스딴의 작가 마지나 말리꼬바의 작품 ‘눈 섞인 개울물’이다. 이 단편은 1995년 장백출판사에서 펴낸 에 실려 있다. 밀라야 뜨로삔까는 ‘다정한 작은 숲길’이라는 뜻으로, 이 책에는 그런 숲길 같은 러시아 작가 33인의 아주 짧지만 서정적인 작품들이 담겨 있다.
사랑의 선물이란 이런 것이다. 한여름의 털장갑처럼, 취향도 기능도 상관없이 상대에게 꼭 필요한 것이 되는 마법 같은 것이다. 자신에게도 그런 선물을 받은 기억, 그런 선물을 준 추억이 있는지 더듬어 꺼내어보자. 지금 그 물건은 사라지고 없다 해도, 그 사랑이 실패로 끝났다 해도, 분명히 남겨진 따뜻함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신기하지 않은가. 그러니 어떻게 사랑을 믿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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