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었는데,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에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 된다. 의미의 집합체인 사랑이 그런 것이었다니. 이렇게 하찮은 것이었다니. 그래서 연애 경험이 너무 없어도 안 되겠지만, 연애를 많이 해본 이들과 사귀는 건 쉽지 않다. 자신이 찼든 차였든, 그런 허무를 거푸 경험한 이들의 마음속에는 꼭 냉소가 숨어 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는 그 차가운 마음을 감싸주는 따뜻한 개그다. 밀란 쿤데라가 누군가. 20세기를 조롱과 농담으로 관통한 유명한 마초 작가가 아닌가. 그런 성향이 어디 갈 리 없지만, 작품 곳곳에 나오는 철학적인 대사들은 이전보다 더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여기에 말년을 맞이한 노작가의 짧은 소설이라는 사실까지 더해져 이 작품은 인생에 대해 내놓은 마지막 답안지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답안지는 희극에 가깝다. 그중에서 가장 시선을 잡는 건 파키스탄 남자와 포르투갈 여인의 ‘말 안 통하는’ 사랑 이야기다.
칵테일파티에 서빙맨으로 온 파키스탄 남자.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그를 ‘발견’한 사람은 그 집에서 구박받는 포르투갈 가정부 아가씨. 남자가 프랑스어를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가정부는 처음에는 어쩔 줄 모르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그동안 쓰지 못했던 자신의 모국어를 마음껏 쓸 수 있는 기회로 여긴다. 두 사람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사랑의 대사를 나누는 장면은 우스꽝스러움을 넘어 풋풋하게까지 느껴지며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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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장면이 인상적인 이유는 이 파키스탄 남자가 ‘가짜’이기 때문이다. 연극배우인 칼리방은 파티 서빙일을 할 때는 자신을 파키스탄인이라 소개하고, 자신이 새롭게 창조하신 파키스탄어를 쓰며, 그걸 들키지 않기 위해 프랑스어는 한마디도 모르는 체한다. 문제는 처음엔 이 장난이 재미있었지만 나중에는 시들해졌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손님들이 그에게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속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속이려는 사람이 관심이 없다면 아무 의미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동질감을 느낀 외로운 이주노동자 아가씨가 그를 바라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에피소드는 이런 말을 들려주는 것 같다.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나를 바라봐주는 상대가 없다면 무의미하다. 상대가 나를 바라보게 되는 것도 내가 어떤 모습인가와 상관없다. 그건 그 상대가 처한 조건에 달려 있으며, 그것도 대부분 우연이다. 사랑하는 동안 상대방과 진심으로 소통하든 소통하지 못했든, 그것은 관계의 성공과 실패와 별 상관이 없다고.
부인하기 힘든 진실이다. 그래, 사랑이라는 게 원래 어이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괜찮다. 천사 같은 포르투갈 아가씨와의 짧은 입맞춤 같은 순간이 있었던 건 분명하고, 그 순간이 사라진다고 해도 또 찾아올 테니까. 사랑이 너무 거창한 것이라면 오히려 우리를 더 괴롭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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