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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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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시여 사람이시여

등록 2014-12-31 15:42 수정 2020-05-03 04:27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2013년 8월 초순이었다. 학습지노조 해고노동자(여성) 2명이 ‘해고자 원직 복직, 단체협약 원상 회복, 노조 탄압 중단’을 요구하며 재능교육 본사 맞은편 25m 높이의 혜화동성당 종탑에서 200여 일째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난간도 없는 비좁은 공간에서 눈, 비, 태풍, 폭염을 견디던 위험한 상황이었다. 일요일 아침, 종탑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다급한 목소리로 내게 혹시 아는 의사가 있느냐고 물었다. 한 명이 며칠째 피오줌을 누고 열이 오르내린다고 했다. 사 쪽은 물론 조합원들에게도 절대 알리지 말고 의사와 종탑으로 와달라고 읍소했다.

1931년과 2003년, 강주룡과 김주익
몇 년 동안 연락 한번 없던 친구에게 염치 불고하고 전화를 걸어 수액을 준비해 종탑에 도착했다. 종탑 내부 계단을 따라 오르는 곳이 끝나는 지점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친구가 고소공포증을 호소하며 벽에 붙은 철근을 잡고 종탑 위로 올라갈 수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해당 노동자가 몇m 아래로 내려와야 했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친구가 주사를 놔본 지가 하도 오래돼 혈관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천만다행으로 한 번에 성공했다. 수액을 갈아 끼우는 방법과 유의사항을 전한 뒤 종탑을 내려오며 속상해서 울었다. 10여 일 뒤 두 노동자는 사 쪽과 잠정합의안을 도출하고 202일 만에 땅에 발을 디뎠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저임금 노동자의 임금을 10% 삭감하면서도 주주들에게는 10~20%의 이익을 배당하는 사 쪽에 맞서 1931년 5월29일 고무공장 노동자 강주룡이 평양 을밀대에 올라갔다. 한국 노동운동사 최초의 고공농성이었다. 그로부터 70여 년이 흐른 2003년 추석을 이틀 앞두고 한진중공업 김주익 지회장이 35m 높이 85호 크레인에서 129일간 농성하다 싸늘한 주검으로 땅에 돌아왔다. 노동자의 삶과 자본의 태도는 일제강점기와 하등 다를 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가 남긴 유서다.

“노동자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 그런데도 자본가들과 썩어빠진 정치꾼들은 강성노조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아우성이다. 1년 당기순이익의 1.5배, 2.5배를 주주들에게 배당하는 경영진들, 그러면서 노동자들에게 회사가 어렵다고 임금 동결을 강요하는 경영진들. 그토록 어렵다는 회사의 회장은 얼마인지도 알 수 없는 거액의 연봉에다 50억원 정도의 배당금까지 챙겨간다. 이 회사에 들어온 지 만 21년, 그런데 한 달 기본급 105만원, 그중 세금 등을 공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팔십 몇만원. 근속연수가 많아질수록 생활이 조금씩이라도 나아져야 할 텐데 햇수가 더할수록 더욱더 쪼들리고 앞날이 막막한데 이놈의 보수언론들은 입만 열면 노동조합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난리니 노동자는 다 굶어죽어야 한단 말인가.”

물어야 한다, 언론에 자본에 정권에

지금도 3곳에서 고공농성이 진행되고 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 2명, 스타케미칼 노동자 1명, 케이블방송 씨앤앰 노동자 2명이 공장 굴뚝과 광고탑 위에서 ‘하늘 사람’으로 살고 있다. “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유행가 가사다. 2015년 새해엔 이 노랫말을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물어야 한다”로 바꿔 부르자. 그리고 묻자. 왜 노동자들이 ‘하늘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이웃에게, 언론에, 자본에, 정권에 캐묻자. 새해 작은 소망이 있다. 지난해 여름 종탑에 오르던 그날의 아픔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린다. 하늘 사람들이시여, 아프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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