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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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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만큼 쪽팔릴 각오 되어 있다면

먼저 연락해온 구여친을 대하는 구남친들의 치사한 심보…
헤어진 뒤 그리움의 표현, 창피하지만은 않아
등록 2014-09-27 12:05 수정 2020-05-03 04:27
일러스트레이션/ long

일러스트레이션/ long

구남친의 찌질함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유명한 대사, “am 02:00 자니?”. 이 우스운 농에 마냥 마음 편히 웃을 수만은 없는 그녀들이 있다. 바로 구남친보다 더 미련이 많고 후회가 남은 구여친이다. 오늘 이야기는 그녀들을 위해 준비했다.

지난해와 올해, 구여친의 추억팔이와 이별 이야기를 담은 독립출판물을 두 권 출간하면서 가장 하고 싶었던 기획은 바로 ‘구남친과의 인터뷰’였다. 1권에서는 진짜 내 구남친을 섭외하려다 결혼 소식을 듣고 케이오(KO)당했고, 2권에서는 결국 남의 구남친 셋을 섭외해 구남친 입장에서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중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이 헤어진 뒤의 연락 문제였다. 여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남자는 개와 같아서(욕 아님) 쫓아가면 도망가고 도망가면 쫓아온다’는 속설이 진짜인지, 정말 여자가 먼저 연락하지 않아야 남자가 연락하게 되는지 시시콜콜 물어보았다.

그들의 대답은 이랬다. 물론 케이스바이케이스겠지만 다시 이전처럼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여자가 먼저 연락하지 않는 편이 당연히 더 좋다고. 그립고 아련하다가도 먼저 연락이 오는 순간 그녀가 달리 보인단다. 이 무슨 심보인가 하니, 구남친 A는 이를 스코어 게임으로 설명했다. 그것은 자신이 이긴 채로 남아 있고 싶은 심리라고 했다. 만약 남자가 찼을 경우, 구여친에게 연락이 오거나 자기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이 보이면 어쨌거나 사람인지라 우월감 같은 것을 느낀다. 그 상태를 깨고 싶지 않아 남자는 절대 연락하지 않는다. 반대로 자신이 찼는데도, 그녀가 연락도 없이 너무나 잘 지낸다면 남자는 혼란을 느끼는 거다. “이상하다. 내가 이기고 끝난 게임이었는데!” 마치 승자가 내가 아닌 듯함을 느낀다. 그래서 그 스코어를 확인하려, 술이 오른 어느 날 구여친에게 먼저 전화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와, 정말 자세하고 그럴듯하지만 ‘남자는 개다!’라던 속설보다 더 믿고 싶지 않은 황당무계하고 치사한 심보다. 내가 한때 사랑했던 그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니 더욱 열이 오른다. 물론 개중에는 사랑에 목숨 거는 순정남도 있고 모두가 이런 것은 아니겠지만 연애마저 스포츠와 같이 생각하는 몇몇 남성들의 심리를 직접 확인하니 무척이나 씁쓸했다. 하지 말자, 연락. 드릅따.

찌질한 구여친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내 경험상으로도 헤어진 그에게는 먼저 연락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그 순간의 연락과 고백이 비록 나는 오래 품어온 진심이었을지언정, 받아들이는 그에겐 아닌 밤중에 홍두깨인데다 한없이 구질구질한 상황이지 않겠나. 그에게 사랑했던 여자를 그저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걸 그랬다는 후회도 든다. 하지만 뭐, 당시의 내겐 ‘내가 괴로우니 너도 엿 먹어봐라’ 하는 심정도 있었던 것 같다. 이별 뒤 죽을 만큼 괴로운데 죽을 만큼 쪽팔리는 것으로 진로를 바꾸는 것쯤이야 크게 문제될 것 없다고도 생각했고. 그 연락 뒤 결과가 얼마나 처참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내가 옛사랑을 떠난 그보다 더 오래, 더 소중히 기억하고 더 표현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무작정 창피하지만은 않았다. 구여친, 당신의 옛사랑과 그 마음을 나는 응원한다. 그와 당신 모두를 충분히 고려하고 생각했다면, 그래도 꼭 해야겠다면 당신의 그리움과 후회, 그에게 전할 수 있을 때 전하라.(대신 유부남에겐 안 됨. 불륜 노!)

구여친북스 대표 @9lover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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