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의 기쁨 중 하나는 오랜만에 만난 조카들을 끼고 자는 것이다. 한때 외숙모가 제일 좋다던 큰조카는 시커먼 고등학생이 되었지만, 아직 그 아래로 졸망졸망한 초등학생들이 꽤 있다. 간만에 본 녀석들끼리 잠자리에서도 수다가 이어진다. 대부분 이런 내용이다. “너네 담임선생님은 좋으냐?” “아니, 숙제를 너무 많이 내줘.” “야, 너 짝꿍은 좋아?” “아니, 나를 싫어해.” 옆에서 듣다보면 좋은 날이 하루도 없다. 이러니 어른들이 “학교 잘 다니냐?”라는 말에 아이들이 언제나 시큰둥하지.
생각해보면 유년 시절을 아름답다 하는 건, 많은 경우 사후적 해석이다. 물론 즐거운 일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겪는 보통의 성장기는 매우 모순적인 상황을 요구한다. 학교에서 만나고 배우는 것들은, 어느 것 하나 익숙하고 잘하는 게 없다. 매일매일 새롭게 배워야 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나의 부족함을 깨달을 때가 더 많다. 안타깝게도 그 과정은 매우 반복적이고 지루하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똑같이 반복되는 시간표가 있다는 것 자체가 일단 모든 흥미 유발을 막는다. 게다가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나랑 맞는 사람이라는 보장도 없다.
이렇듯 ‘멋모르고 좋기만 할 때’인 어린 시절만 들여다봐도 그 안에는 행복보다는 불행의 요소가 더 많이 숨어 있다.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의 운명은 행복보다 불행에 훨씬 더 가깝다”고 했고, 그의 제자이자 딸인 안나 프로이트도 “왜 사람들은 인생이 행복해야 된다고 생각하는가. 삶은 대부분 불행하고 가끔 행복한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 인생만 그런 게 아니라 사랑도 그렇다. 캐나다 토론토대학의 마리 루티 교수는 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랑이 곧 행복이라는 것은 착각이다. 사랑이 행복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그 둘은 동의어가 아니다.” 불행한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사랑’마저 이 꼴인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야말로 사랑하는 관계에서 자신의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좋은 도구라고 생각한다. 사랑한다고 해서 갈등이 없는 게 아니다. 더하여 엄청난 희생과 상처만 남기고 깨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자신을 패배자로, 상대를 부족한 사람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안 좋은 일이 생겼으면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면 된다. 인생이 원래 좋은 일만 있지 않듯, 사랑해도 아프거나 비참할 수 있다. 나에게만 일어난 불행이라거나, 내가 뭔가 ‘노련하지 못해서’ ‘잘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게 쉽지는 않다. 다른 사람들은 더 심할 거라는 알리바이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름 심각한 조카들에게 나의 흑역사를 말해주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단 한 명의 담임선생님도 좋은 분이 없었다, 짝꿍과 피멍이 들 때까지 서로 꼬집으며 싸웠다, 그런 이야기를 듣자 조카들은 금세 조용해져서는 아주 편안한 얼굴로 잠들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천사 같은지. 나중에 여자친구, 남자친구 생기면 밤새도록 문자질 하느라고 어릴 때 놀아주던 숙모는 뒷전일 녀석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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