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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한 천국이 눈앞에

보드카수박
등록 2014-07-11 16:40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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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도 더 전의 일이다. 후덥지근한 여름밤, 어김없이 ‘그 남자’를 찾았다. 당시 내 ‘재미’의 총집합체는 ‘그 남자’였다. 그의 손놀림에 심장은 100배 요동쳤다. 춤추듯 휘젓는 그의 손짓은 내 영혼을 나른한 천국행 버스에 태웠다. 몸도 반응했다. 가장 먼저 혀에서 신호가 왔다. 흥건한 침이 고였다. 그 남자의 이름은 영국의 스타 셰프인 제이미 올리버. 를 진행하는 그 남자는 멋있었다.

여름밤 친구들을 초대한 그. 커다란 수박을 주방 식탁에 턱 올렸다. 수박화채라도 만드나 싶었는데 난데없이 보드카 한 병을 수박에 꾹 박는다. 졸졸 러시아의 웅장함이 흘러 들어갔다. 여름밤 파티 디저트였다. ‘오호, 세상에 저렇게 간단한 요리가 있다니!’ 귀차니스트를 위한 최고의 간편식이다. 언젠가 꼭 해보리라 결심했다.

기회가 왔다. 도전에 나섰다. 5~6kg의 수박을 샀다. 보드카는 스톨리치나야를 골라 팍 꽂았다. 예술 감각이 돋보이는 앱솔루트 보드카가 아무리 대세라지만 보드카 하면 역시 스톨리치나야다. 스톨리치나야는 러시아의 전통 보드카다. 10분, 20분, 30분, 시간이 흐른다. 어째 좀 이상하다. 보드카가 줄지 않는다. 뽑았다. 복병을 만났다. 빨간 수박 조각이 병 주둥이를 막고 있었다. 조각을 빼고 더 깊이 힘을 줘서 쑤셔넣었다. 우지직! 휘청! 술 취한 수박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단단하고 무거운 보드카 앞에서 수박은 무너졌다. 같은 레시피라도 만드는 이의 재주에 따라 맛이 다르다. 내가 제이미가 될 수는 없었다. 어쨌든 보드카 특유의 향이 밴 수박 맛은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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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름날, 늘 그리운 시원한 마실거리는 리슬링 화이트와인이다. 한때 와인에 미친 듯이 돌진해 ‘마시기’와 ‘열공’을 한 적 있다. 알면 알수록 어려운 와인은 이미 폭탄주에 길든 내 몸과 잘 맞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만 독일 모젤강과 라인가우 지역에서 생산되는 포도품종 리슬링으로 만든 화이트와인만은 예외였다. 적당히 ‘칠링’해서 더운 바람 부는 노천카페 발코니에서 한잔 마시면 나른한 천국이 눈앞에 나타난다.

박미향 문화부 기자여름의 맛, 다른 메뉴

  부드러운 달콤함_ 이상희 블로그 ‘자취왕 꿀키의 꿀맛나는 자취일기’ 운영자

  5분 만에 후다닥 후루룩_ 조경규 작가

  와사삭 베어물 때의 쾌감_ 류태환 ‘류니끄’(Ryunique) 오너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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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쌈 싸서 먹는 추억의 맛 _ 박현진 감독, 공동연출

  바다와 콩밭 입안에서 넘실_ 이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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