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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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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소설이 숨어 있는 방

집필실 제공하기로 한 프린스호텔과 연희문학창작촌·토지문화관 등

전국 각지의 ‘창작의 방’… 작품을 품되 직접 드러나지는 않는 그곳
등록 2014-05-02 09:53 수정 2020-05-03 04:27

갑작스레 큰 상실을 겪은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아마도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다(어쩐지 그런 것 같다). 나의 슬픔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하지만 한 사람이 직접 당한 슬픔의 타격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측정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이 우습고 말도 안 되는 시도).” 프랑스의 기호학자이자 문학가인 롤랑 바르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날 를 쓰기 시작했다. 짧은 메모를 모은 이 일기는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채로” 삶을 이어가는 남은 자의 주체할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하다. 2년이나 이어졌다.
거대한 배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탁한 바닷속에 가라앉았다. 여태껏 단 한 사람도 걸어나오지 않은 그 바다의 소식을 전해들으며 우리는 울기도, 화를 내기도, 무슨 행동이든 하자고 결의를 다지기도 한다. 더불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집요하게 추적한 이의 글을 보면서 그 고통을 아주 조금이나마 가늠해보기라도 하는 것이다. 문학은 이렇게, 오래 우리 삶의 여러 부분과 맞닿으며 공감이나 위안을, 혹은 존재나 현실의 부조리를 말하며 분노하거나 깊이 고민할 여지를 전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나날을 또 다른 형식으로 되뇌는, 문학이 탄생하는 공간을 찾았다.

그저 생각을 방해 안 하는

연희문학창작촌의 집 필실에서 정영문 작가 가 작업을 하고 있다 .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연희문학창작촌의 집 필실에서 정영문 작가 가 작업을 하고 있다 .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도요창작스튜 디오에서는 문학을 접 하기 힘든 지역적 특 성을 고려해, 기성 작 가들을 초청해 주민과 소통하는 시간을 갖 는다. ‘도요 맛있는 책 읽기’ 행사에 초청된 소설가들과 북콘서트 현장. 탁기형 khtak@hani.co.kr, 도요창작스튜디오 제공

도요창작스튜 디오에서는 문학을 접 하기 힘든 지역적 특 성을 고려해, 기성 작 가들을 초청해 주민과 소통하는 시간을 갖 는다. ‘도요 맛있는 책 읽기’ 행사에 초청된 소설가들과 북콘서트 현장. 탁기형 khtak@hani.co.kr, 도요창작스튜디오 제공

사실 또 하나의 계기는 서울 명동의 한 호텔에서 어느 작가의 칼럼을 읽고 집필실을 제공하기로 했다는 소식에서 비롯했다. 작가 윤고은은 올해 초 격주간 잡지 에 문청 시절 동료들과 하룻밤 호텔에서 합숙하며 신춘문예 공모를 준비했던 추억에 관한 칼럼을 썼다. 그 글을 조금 떼어 옮기면 이렇다. “당시 나는 이름도 거만한 ‘영재동인’이란 소설 스터디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스승들의 합숙 훈련법을 모방해보기로 했다. 30년 전 그들은 여관방을 하나 잡고, 방의 네 벽면을 네 사람이서 하나씩 맡아 거기에 자신의 소설 원고지들을 한 장씩 붙였다고 했다. 그 이야기가 어찌나 낭만적으로 들렸던지, 결국 영재동인에서도 12월 어느 날 명동의 프린스호텔(지금도 있다)을 예약했다. …단 하루의 합숙 훈련은 시작되었고, 열심히 소설에 대한 토론을 하는 사이 밤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이 글을 접한 서울프린스호텔 쪽에서 젊은 문학인들을 위한 집필실 제공 계획을 밝혔다고 (4월17일치)가 전했다. 서울프린스호텔 이의구 총무팀장에 따르면 “서울의 호텔 객실 1~2개와 제주 남원읍에 있는 직원용 숙소를 작가들을 위한 공간으로 제공할 예정”이다. 번잡한 명동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공간, 외국인 관광객과 스치며 로비를 지나는 메트로폴리탄의 한가운데와 한갓진 제주의 숙소, 정반대의 두 공간은 작가에게 어떤 영감을 가져다줄까.

이보다 앞서 전국 각지에 마련된 집필실들이 있다. 강원도 원주 토지문화관, 서울 연희문학창작촌 등은 유명 작가들이 여럿 거쳐가기도 했고, 그곳에 머물렀던 이들이 공간에서의 경험을 글이나 말로 풀어내기도 하면서 일반 독자에게도 많이 알려졌다. 이외에 전남 담양에 위치한 글을 낳는 집, 경남 김해의 도요창작스튜디오 등을 비롯해 서울 프린스호텔의 예처럼 기업이 지원하는 작가 집필실도 있다. 이들 작가의 방은 소리 없이 조용히 한국문학에 숨결을 불어넣는 문학의 공간이지만 등단한 신인 및 기성 작가로 입주 조건이 제한된 경우가 많아 독자나 문청들의 호기심을 자아내는 곳이기도 하다.

작가의 방은 단출했다. 4월23일 연희문학창작촌에서 만난 작가 정영문은 늘 어디론가 떠돌며 글을 쓴다. 지난해에는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 머물렀고, 2011년 를 집필하던 당시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작품을 썼다. 국내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이용하기는 연희문학창작촌이 처음이다. 그의 방은 침실과 집필실이 분리돼 있다. 집필실에는 자전거 한 대, 작은 냉장고 하나, 책상과 책장, 낮은 테이블 하나가 전부다. 커피 원두를 담은 봉투, 미처 씻지 못한 커피잔, 시집 한 권과 노트북이 책상에 놓여 있었다. 책장에 책은 거의 꽂혀 있지 않았다. “집이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필요한 책만 가져다놓고 보는 편이에요.” 단어를 고르고 신중하게 말하는 작가처럼 집필실 또한 번잡한 기운이 없다. 연희문학창작촌의 공지혜씨는 “작가의 성향에 따라 가져오는 물품, 방의 느낌이 다르다”고 전했다. 책상이 마주한 창밖으로는 대나무 몇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그 건너로 맞은편 주택의 마당이 보였다. 작가는 글을 쓰다 가끔 밖을 내다보며 이웃 몰래 오래된 정원을 공유하곤 한다. 너른 마당을 둘러싼 나무들은 집이 짊어진 시간만큼이나 울창했다. “할머니 한 분이 가끔 빨래 널 때만 나와요.”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많은 자료나 잡다한 물품들보다 그저 생각을 방해하지 않을 조용한 풍경 같은 것이면 충분한 듯했다.

소설을 쓰려면 벽이 필요해

연희문학창작촌이 서울 한복판, 도심에서의 삶과 멀지 않은 곳에 꾸려진 공간이라면 강원도 원주의 한적한 동네에 자리잡은 토지문화관은 국내 작가 레지던시의 원조 격이다. 알려진 대로 박경리 선생이 생전 후배 작가를 양성하기 위해 1999년 문을 열었다. 문인 창작실 지원사업은 2001년 시작했다. 소설가 강호삼은 2013년 7월호 ‘창작실 순례’ 꼭지에 ‘토지문화관’이라는 제목으로 그곳에서의 생활을 쓰기도 했다. 건물의 모양, 치열한 입주 경쟁, 서울에서 가는 방법 등 토지문화관 이용기에 가까운 소설가의 세밀한 묘사를 따라가다보면 그곳에서의 하루 일과가 눈에 그려진다. “각 창작실의 넓이는 33.3m²(10평) 정도다. 샤워기가 설치된 화장실과 옷장, 신발장, 책상과 걸상, 스탠드, 침대와 작은 냉장고, 이불과 베개, 음료수를 끓일 수 있는 무선주전자, 선풍기 등의 비품이 마련되어 있다. …아침 식사는 셀프다. 빵과 치즈, 버터와 우유, 음료수, 계란 등이 식당의 냉장고에 준비되어 있어서 토스트기와 프라이팬으로 간단한 요리를 해먹을 수 있다. 점심과 저녁은 매지리 토박이인 주방 아주머니의 깔끔하고 손맛이 제대로 들어간 균형 있는 식단이 준비된다.”

토지문화관 여지인 학예사에 따르면 토지문화관에 마련된 작가의 방에는 연간 50~60명의 문인이 다녀가며 30여 명의 다른 장르 예술인도 머물다 간다. 외국 작가 및 재외동포 창작실에는 연간 10여 명이 참가한다. 작가 집필실은 지원한 작가들에 한해 일정 기간 무료로 제공되지만, 등단 작가가 아니더라도 이용은 가능하다. 1일 5만원의 숙박비를 내면 비어 있는 집필 공간을 이용할 수 있다.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식사를 제공받을 수도 있다.

경남 김해시 생림면에 있는 도요창작스튜디오 또한 문인을 위한 공간이다. 극작가 이윤택이 이끌어가는 이곳은 희곡에 특화돼 있다. 무대를 얻기 힘든 신진 작가를 위해 스튜디오 소속 배우들이 공연을 꾸리기도 한다. 낙동강가에 위치한 도요창작스튜디오는 도심과 한참 떨어져 있다. “여기 생림면 도요마을은 김해로 가는 마을버스가 하루 다섯 번밖에 안 다니는 도로의 끝에 있는 마을이에요.” 도요에서 창작촌 큐레이터 역할을 하며 희곡을 쓰는 김세환 작가의 말이다. 더 이상 길이 이어지지 않는 이 마을에 위치한 고요한 작가의 방은, 여느 집필 공간처럼 침대와 책상, 책장 등이 전부다. 먹고 쓰고 잠들기 위한 단순한 공간이다. 오로지 작품을 쓰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다 소수의 작가가 교류하다보니 서로 큰 영향을 주고받는다. 창작촌에 입주했다가 장르를 옮겨 작품을 발표하는 이도 꽤 있다고 한다.

국내외 각지의 집필실을 오가며 글을 써오면서도 사실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눈앞에 가로막힌 벽이었다고 말하는 작가도 있다. 소설가 백가흠은 가장 기억에 남는 작가의 방으로 그리스 아테네의 한 아파트를 기억한다. 제우스 신전이 내려다보이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서재는 사방이 꽉 막힌 곳이었다. “현관 입구에 관처럼 생긴 곳에 책상만 하나 있는 곳이었는데, 멀리 이국에 있었지만 벽으로 둘러싸인 서재는 언제나 시선을 한국으로 향하게 만들었습니다.” 작가는 좋은 풍광보다 어릴 적 꽉 막힌 도서관 열람실에서 작은 벽을 통해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던 점을 회상한다. “소설을 쓰려면 벽이 필요해요. 과거와 역사를 탐색하고, 그것들을 정리한 메모를 붙여놓을. 작은 창이 책상 옆에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상관없어요. 작가는 벽을 통해 세상을 보니까요.” 한편 소통의 지점도 필요하다. 그의 라디오는 언제나 FM 93.1MHz에 주파수가 맞춰져 있다. 클래식 음악 채널이다. 좋아하는 그림도 두 점 걸어둔다. 그것들을 바라보며 생각이 없어지는 순간이 소중하다. “비워야 생각도 차는 것이니까.” 사방이 벽으로 막힌 방에서 작가는 집요하게 삶과 세상을 들여다보고 연결된다.

작가의 방이란 작가의 마음에

사방 벽으로 가로막힌 방, 길이 끊어진 마을, 몰두하기 좋도록 반듯하게 마련된 공간 등에서 여러 번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을 문장이 탄생한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작가의 방은 정해진 공간을 벗어나기도 한다. “마감이 급하면, 달리는 지하철도 작가의 방이 돼요.” 소설가 정이현의 말이다. 허희 평론가와 함께 진행하는 팟캐스트 에서 마침 ‘작가의 방’이라는 주제를 다뤄보려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천명관 작가가 게스트로 출연했을 때 하려던 주제였어요. 우리는 왜 방을 찾아헤매면서 쓰는가, 그런 얘기를 나눴는데 사실 노트북만 있으면 어디든 작가의 방이 될 수 있거든요. 공간적인 의미도 있지만 결국은 심리적인 문제… 이런 얘기를 했어요. 결국은 작가의 방이란 작가의 마음에 있는 거다.” 그러고 보니 백가흠 작가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에게 작가의 방이란 “글을 쓰는 과정 자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작가 개인을 내려놓는다는 말이고, 창작실이란 개인을 버린 작가를 품는 곳이라 생각해요.” 정영문 작가는 “작가가 영감을 얻는 데 영향을 미칠 수도 있겠지만, 작품에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 공간”이 작가의 방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어쩌면 허탈한 결론일지 모르겠지만 내밀해서 궁금한 그 공간은 사실 더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것일 수도.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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