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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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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뒷다리에 수건을 걸어도 될까

용도의 발견
등록 2014-04-19 16:02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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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패디먼은 에서, 책이라는 물건 자체가 손상되지 않도록 고이 떠받드는 ‘궁정식 사랑’과는 달리 자신은 책과의 ‘육체적 사랑’을 나누는 파라고 말한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책에 허용된 일은 단 한 가지 그것을 읽는 것뿐이라고 믿는 궁정식 연인들이 어떤 손해를 보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기우뚱한 물건을 받칠 때, 문이 바람에 닫히지 않게 괼 때, 풀이 잘 붙도록 눌러놓을 때, 울퉁불퉁한 양탄자를 펼 때, 그들은 달리 무엇을 사용할까?”

1966년 출간돼 4천만 부 이상 판매되며 ‘성경만큼 많이 팔린 책’이라 불리는 은 참 잘 만든 책이다. 특히 뜨거운 국물요리가 많고 라면이 대중적인 우리나라의 식문화 속에서 이 지닌 두께와 강도는 이상적인 냄비받침의 필요충분조건과도 같아서 빛난다. 참으로 오랜 세월 ‘육체적 사랑’을 많이 받은 책이리라.

A. A. 밀른의 책 에는 곰돌이 푸가 래빗의 집에 놀러 갔다가 꿀과 연유를 잔뜩 얻어먹고는 기어나오다 문에 배가 끼어버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푸가 일주일 동안이나 오도 가도 못하고 끼어 있는 사이 래빗은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당신은 지금 우리 집 공간을 상당히 차지하고 있어서… 그러니까, 당신 뒷다리를 수건걸이로 써도 괜찮겠어요? 내 말은 당신 뒷다리가 그냥 거기에, 쓸모없이, 뻗쳐 있기만 하니까….” 그래서 푸의 뒷다리는 용도 변경돼 래빗의 수건걸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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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양화대교에서 연결되는 선유도공원은 원래 1978년부터 2000년까지 수돗물 정수장이었는데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자 기존 시설들을 활용해 공원으로 바꾼 것이다. 콘크리트 수로가 있던 곳은 ‘시간의 공원’으로 바뀌었고, 물을 가둬두던 곳은 ‘수생식물원’으로 멋지게 탈바꿈했다. 오랜 세월 역할을 수행하며 모가 닳은 콘크리트 시설들이 머금은 시간의 흔적은 선유도공원에 근사한 아우라를 드리운다.

영국의 테이트모던미술관은 원래 1981년까지 쓰이던 발전소 건물이었다. 99m에 달하는 발전소 굴뚝은 이제 밤이면 등대처럼 빛을 발하며 저 유명한 상징물로 서 있다. 인간은 목적을 위해 뭔가를 만든다. 그런데 일단 뭔가가 만들어지면 거기서 새로운 용도를 발견할 수도 있는 법이다.

경기도 파주 헤이리에 친구가 산다.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이 언니네 집엔 얼핏 쓸모없어 보이는 물건이 구석구석 많기도 하다. 하루는 친구들 여럿이 그 집에서 놀다가 날이 어둑해졌는데, 언니가 마당 구석에 쌓여 있던 기왓장 하나를 가져오더니 뒤집어놓고 그 안에다 초 3개를 켜준다. 일부러 만들려고 해도 못 만들, 큼직하고 멋스러운 캔들 홀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김하나 카피라이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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