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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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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아웃코스를 기억하라

다시 올림픽 트랙 위에 서기 위해 ‘귀화’라는 전대미문의 아웃코스 선택한 쇼트트랙의 안현수
삶의 존엄한 가치 증명하다
등록 2014-02-12 15:12 수정 2020-05-03 04:27
<YONHAP PHOTO-1371> Sjinkie Knegt (R) of the Netherlands' team gestures next to Victor An (L) of the team of Russia celebrating after Russia won the men's 5000m relay final race of the ISU European Short Track speed skating Championships in Dresden, eastern Germany, on January 19, 2014. Russia won the race ahead of the Netherlands (2nd) and Germany. AFP PHOTO / ROBERT MICHAEL../2014-01-20 16:22:57/ <저작권자 ⓒ 1980-2014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Sjinkie Knegt (R) of the Netherlands' team gestures next to Victor An (L) of the team of Russia celebrating after Russia won the men's 5000m relay final race of the ISU European Short Track speed skating Championships in Dresden, eastern Germany, on January 19, 2014. Russia won the race ahead of the Netherlands (2nd) and Germany. AFP PHOTO / ROBERT MICHAEL../2014-01-20 16:22:57/ <저작권자 ⓒ 1980-2014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그가 바깥쪽으로 날 추월할 때면 머리가 하얘진다. 그의 스케이팅에서 아름다운 오로라가 나오는 것 같다.”

안톤 오노의 증언이다. 그래, 바로 그 안톤 오노다. 이번 소치 겨울올림픽에서 미국 스포츠의 해설을 맡게 된 오노는 “빅토르 안은 기술과 스케이팅하는 방법 등 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수”라며 극찬했다. 두 선수 모두가 전성기였던 2006년 토리노 겨울올림픽에서 안현수는 3관왕에 올랐다. 오노는 가까스로 뒤따라왔다. 2003년에서 2007년까지 세계선수권대회를 5연패하던 시절의 안현수다. 역시 토리노 대회 때 안현수의 뒷모습만 보고 달린 캐나다의 에릭 베다드는 “안현수는 앞에서 뒷짐을 지고 달리는데 나를 비롯한 다른 선수들은 양손을 흔들어도 격차가 점점 벌어졌다. 그를 따라잡는 걸 체념했다”고 말했다.

물리학 법칙 무효로 만드는 코너링

아웃코스를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안으로 치고 들어올 때도 전혀 속도의 변화가 없는 안현수가, 전성기를 함께 보낸 여러 선수들이 모두 은퇴한 지금, 29살의 나이로 다시 소치의 트랙 위에 섰다. 알다시피 러시아 국적이다.
절정기에 비해 기량이나 체력은 어떠한가. 2014년 1월, 안현수는 독일 드레스덴에서 열린 ‘2014 유럽 쇼트트랙 선수권대회’에서 500m, 1천m, 3천m 그리고 5천m 계주에서 우승했다. 적어도 유럽에 한해 그는 4관왕이다.
16살 때부터 국제 무대에 등장한 안현수는 그렇게 10년 넘게 찬사와 질투와 파란을 일으키며 세계 쇼트트랙의 좌표를 찍어왔다. 뿌리 깊은 파벌 싸움, 고의적인 방해, 악의적인 반칙 등을 겪은 안현수가 최후의 결단으로 ‘러시아 귀화’라는 거대한 아웃코스를 결정했을 때, 사람들은, 특히 젊은 사람들은, 그가 겪은 트랙 안팎의 흉흉한 추문들을 기억해내고는 더 이상 ‘국위 선양’이라는 낡은 국가주의 프레임으로 그를 속박하는 일을 멈췄다. 그리고 재기하기를 바랐다.
모든 뛰어난 선수가 그렇듯이, 안현수 역시 엄연히 존재하는 물리학 법칙을 이겨내거나 때로는 찰나의 순간에 그런 법칙 자체를 무효로 만들어버리는 코너링을 해왔다. 이번 대회에서 우리는 그 절정의 한순간을 다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구심력을 확보하기 위해 오른발을 왼발보다 더 왼쪽으로 과감하게 가로지르기를 할 때, 그리하여 링크 중심에서 누군가 보이지 않는 밧줄로 그를 팽팽하게 당기는 듯한 착시현상마저 일으킬 때, 우리는 그의 국적을 잠시 잊어버릴 것이다. 물론 경기 결과는 알 수 없고 그의 이름을 어려서부터 우러러왔던 한국 선수들도 안현수보다 한 뼘이라도 더 스케이트 날을 내뻗기 위해 질주할 것이다. 그런 순간들을 위해 그들은 존재한다.

절정의 순간, 국적은 안 중요해

안현수는 바로 그 순간, 즉 다시 한번 올림픽 트랙 위에 서기 위해 귀화라는 전대미문의 아웃코스까지 선택했다. 그러므로 그의 국적이 러시아든 한국이든 혹은 캐나다나 중국이든, 그러한 것은 절정의 한순간에서만큼 별로 중요한 일이 못 된다. 메달 색깔도 둘째 문제다. 자기 삶의 존엄한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강렬하고도 유일무이한 좌표를 끝끝내 찾아내려는 사람이라면 안현수의 거대한 아웃코스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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