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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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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도시에 게릴라들이 질주하오

공터에 씨 뿌리기·못 떠난 고양이 밥 주기·막히는 길 질주하기·추석 음식 파티
‘은밀하게 위대하게’ 빈 도시를 즐겨라
등록 2014-01-30 15:33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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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와 사람으로 들끓는 거대한 도시는 설과 추석, 1년에 두 번 한가해진다. 국토교통부는 이번 설 연휴 한국교통연구원의 교통 수요 조사 결과 2769만 명이 고향으로 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1일 평균 이동 인구는 554만 명으로 평시(337만 명/일)에 비해 64.4% 많은 수치다. 이동 수단은 승용차가 83.8%로 가장 많았다. 도시를 점유했던 승용차가 사람들을 싣고 전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진다는 얘기다. 명절 연휴 귀성객과 여행을 떠난 이들로 모처럼 썰렁해진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텅 빈 거리에서 도시의 게릴라 혹은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을 상상해보거나, 느릿느릿 한적한 도시를 산책하다 영화에서처럼 타임슬립에 빠져보는 공상에 잠겨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게릴라 1이 씨앗을 뿌리오

‘은밀하게 위대하게’ 적이 없는 틈을 타 자기만의 미션을 수행할 계획을 세운 도시 게릴라들이 있다. 생명·동물책을 주로 출간하는 출판사 ‘책공장더불어’ 김보경 대표는 사람들이 떠난 명절 연휴는 길에 사는 동물들에게 밥을 주기에 절호의 기회라고 전했다. “쌀쌀해지면 거리에 사람이 드물어서 동물들이 덜 노출되어 밥 주기가 비교적 용이한 편인데, 명절은 진짜 좋다. 정말 서울 거리에 사람이 없다.” 서울 종로구에서 활동하는 캣맘이기도 한 김보경씨는 명절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지 않고 서울에 머문다. 언제나 밥을 먹으러 오는 고양이들을 일상과 다름없이 챙긴다. 고양이 밥을 주다보면 동네 주민들과 이런저런 다툼에 휘말리는 경우가 있는데, 명절은 밥을 주는 이나 먹는 동물이나 조금 홀가분해진다. 명절에 집을 비우는 캣맘들은 연대하는 다른 이들에게 부탁하고 떠나기도 한단다. 명절의 기름진 음식을 동물들과 나누기도 한다. “지난 추석에는 생선전과 새우전 등을 고양이들에게 나눠줬다.” 사람들이 떠나 한가해진 골목길을 들여다보라. 영역 동물인 고양이는 명절이라고 먼 곳으로 떠나지 않는다. 누군가의 연대를 기다리며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지난 30일 저녁 서울시 논현동에서 이효선(30)씨가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이씨는 2년째 직장 주변에서 길고양이 두 마리를 돌보고 있는 캣맘(고양이 엄마)이다.

지난 30일 저녁 서울시 논현동에서 이효선(30)씨가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이씨는 2년째 직장 주변에서 길고양이 두 마리를 돌보고 있는 캣맘(고양이 엄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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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가드닝. 의류업체 이새의 게릴라가드닝 행사.

게릴라가드닝. 의류업체 이새의 게릴라가드닝 행사.

직장인 이미진(32)씨는 요즘 폭탄 제조에 한창이다. 1일 게릴라 가드너가 되어 여기저기 씨앗 폭탄을 터트릴 계획이다. 게릴라 가드너는 누구도 돌보지 않는 땅을 가꾸는 이들이다. 주인이 있는데도 버려져 있거나 황폐한 땅에 작물을 심고 꽃씨를 뿌려 땅을 땅답게 사용하는 것을 모토로 한다. 1960년대 미국에서 처음 시작되고, 한국에서는 리처드 레이놀즈의 책 이 번역·출간되면서 방치된 땅을 비밀스럽게 가꾸는 이들이 늘었다. 이씨는 게릴라 가드너 모임 등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그냥 주머니에 씨를 품고 나가서 쓸쓸해 보이는 틈마다 뿌려볼 생각”이다. 그가 게릴라 가드닝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난해 가을 집 근처 분쟁으로 공사를 멈춘 공터에 핀 한 무더기 채송화 덕분이다. 누군가 심었는지, 혹은 자생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사시사철 삭막했던 풍경을 뚫고 돋아난 생기에 가슴이 벅찼다. “초보 가드너이므로 추운 겨울에 모종을 심고 보살필 여력은 없고, 씨앗을 뿌린 포인트를 기억해뒀다가 다가오는 봄에 돋아날 새싹을 기다릴 참”이다.

게릴라 2가 질주하오

텅 빈 도시를 달리는 이들은 두 가지를 상상한다. 유령도시를 떠올리거나, 레이싱 영화에서처럼 도시의 도로가 마치 거대한 세트장 같다고 느끼거나. 서울에 사는 에세이스트 김현진씨는 명절이 되면 일단 택시를 잡는다. 코스는 이미 마음먹었다. 늘 자동차로 꽉 막혀 있는 올림픽대로를 달린다. 강남에서 목동까지. 지칠 줄 모르고 밀리던 그 길을 질주한다. “평상시 어느 때나 막히는 길을 주로 고른다. 예컨대 동부간선도로 같은 데도 좋다. 그 길을 달릴 때야말로 평소 서울과 굉장히 다름을 느낀다. 마치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한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신기하기도 하고, 항상 붐비던 길이 텅 비어 있으니 유령도시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골드러시로 사람들이 몰렸다 썰물처럼 빠진 과거 미국 서부의 금광 도시 같은 데를 상상하거나, 영화 시리즈 같은 것을 떠올리는 거다. 물론 저편에서 기차가 달려오는 철로를 관통하고 슈퍼카를 탄 상대방과 도로에서 흡사 레이싱 경주를 펼치거나, 좁은 골목과 커브길을 가속한 채로 돌파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런 것을 상상할 수는 있다. 앞 차에 도망자가 타고 있고 나는 (비록 택시에 승차해 있지만 언제든 대신 운전대를 틀어쥘 수 있는) 뛰어난 레이서인 것이다! 많은 이들이 떠난 텅 빈 도시는 잘 닦인 도로를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다. 한편 “그런 날(명절)까지 운전하시는 분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사연들이 있다.” 차가 신호에 걸릴 때마다 사연의 조각들을 전해들으며 김씨는 영화에서 깨어나 소시민의 애환을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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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 3이 한가한 미로에 빠졌소

도로를 질주하고, 나의 뒤통수를 호시탐탐 노리던 적이 사라진 틈을 타 각개전투를 벌이는 것만이 빈 도시를 만끽하는 방법은 아니다. 우리의 상냥한 이웃들은 때때로 한가한 산책을 방해하는 적이기도 했다. 연휴를 맞아 이들이 떠났다는 것은 오랜만의 여유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시나리오작가 김지현씨는 지난 추석 집에서 예술의전당까지 산책을 했다. 고속터미널 근처라 늘 붐비는 집 앞 차도는 명절 당일 오랜만에 비교적 여유를 찾은 듯 보였다. “걷다 도착한 국악원 앞마당에서 강강술래, 지신밟기 등 행사를 하길래 구경했다. 도서관·전시관 등 대부분의 공공시설이 문을 닫아서 한적하게 무언가를 즐기기가 힘든데, 도시에 남은 시민들을 위해 이런 공연을 해주니까 반가웠다.” 대중문화평론가 김봉석씨는 “연휴에 영화관 근처만 북적인다는 말은 20년 전 얘기다. 지금은 사람이 그렇게 빠져나갔는데도 번화가는 평소만큼 행인이 많다”며 칩거야말로 빈 도시를 진짜 누리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김씨의 말대로 도시 주요 상권의 가게들은 명절 연휴 기간에도 문을 열고 장사한다. 하지만 명절 당일에는 셔터를 내린 곳이 많다. 프리랜서 잡지 기자 K(31)씨는 지난해 추석 홍익대 인근 단골 가게가 문을 닫아 곤란했다. 하루를 보낼, 마음에 드는 카페를 찾아 거리를 헤매다 한적한 주택가에 문을 연 가게에 겨우 찾아 들어갔다. “평소 익숙했던 길인데도, 사람이 덜 붐비고 문 닫은 가게가 많으니 낯선 곳에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왠지 황홀했다.” 그는 올해도 연휴가 만들어내는 도시의 미로에 빠져볼 생각이다.

도시를 떠나 또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이도 있다. 직장인 P(36)씨는 자동차를 몰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달린다. P씨는 고향 도시에서 빈 공간을 찾는다. 부모님이 사는 오래된 동네는 명절에 오히려 평소보다 활기를 띤다. 차도, 사람도 많은 동네를 벗어나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찾는다. 명절에 헌책방은 인근 번화가에 문 연 상점들에 비해 그다지 인기가 없다. 특히 설 당일에는 태반이 문 닫은 가게다. 하지만 간혹 무슨 사연인지 불을 밝힌 곳이 있다. 한적한 골목에서, 그날만큼은 장사에 뜻이 없어 보이는 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득템’을 노린다. 아마도 읽지 않을 것 같은 어려운 책을 싼 맛에 몇 권 고른다. 낡은 책을 품고 문 닫은 상가 사이를 헤집다보면 그 또한 도시를 질주하는 김현진씨나 미로 같은 길을 헤매던 K씨가 느꼈던 것처럼 커다란 세트장에 들어선 느낌이 든다. 오랜만에 한가해진 도시는 사람들로 하여금 영화적 상상력을 부여한다. 영화 에서처럼 낯선 길모퉁이에서 모르는 사람의 차를 얻어타고 타임슬립에 빠지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직장인 K(39)씨는 등산을 할 계획이다. 최근 북한산을 가면 ‘중국 사람들이 한번에 뛰면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이 생각날 때가 있다. 주말의 그 많은 등산객들 때문에 조만간 북한산이 무너질 것 같다. 최근의 등산에는 준산악인 선배를 따라갔다. 마침 눈이 온 다음날이었다. 선배는 누구도 밟지 않은 눈을 밟아야 직성이 풀리는 어린아이처럼 길이 아닌 길로 갔다. “사람이 많잖아.” 하지만 첫눈 밟는 등산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소리는 아래에서 위로 간다는 것을 증명하듯 귓가를 떠나지 않는 절의 공사 소음과 새롭게 조성된 아파트 단지를 통해 올라오는 “우리 이제부터 친하게 지내요” 하는 신생 산악회의 사람들로 등산길은 시장을 방불케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시장을 열 바퀴 돌걸. 서울은 만원, 대신 설에는 5천원이다. 평일 휴가는 여의치 않지만 설 휴가는 자유자재로 즐길 수 있는 몹쓸 중년 싱글은 한적한 북한산이란 어떨까, 한번 상상해본다.

게릴라 4는‘명절=파티’라 하오

설 연휴 서울시는 심야버스 9개 노선을 연휴 내내 자정부터 새벽까지 정상 운행하고, 심야 전용 택시를 1천여 대 투입하기로 했다. 귀경객이 많은 1월30일과 31일에는 시내버스와 지하철 운행을 새벽 2시까지 연장한다. 도시 유랑자들은 밤새 운행하는 대중교통에 몸을 싣고 다시 도시에 차오르는 사람들을 피해 달려간다, 마지막 파티장을 향하여. 대중문화비평가 이명석씨는 매년 명절마다 친구들과 모임을 연다. 친척들의 잔소리에 시달리던 비혼·미혼자 친구들이 각자 집에서 명절 음식을 싸들고 누군가의 집으로 모인다. “제2의, 우리끼리의 명절을 보내는 것이다.” 그제야 음식 맛을 느끼며 휴가다운 휴가를 보낸다. 김지현씨도 작업실 삼은 카페에 나와 일하는 사람들과 명절 음식을 나눈 기억이 있다. “지난 추석에 따로 음식을 싸와 카페 직원들에게 나눠줬는데, 그날 일과를 마치고 와인과 함께 작은 파티를 열더라.” 빈 도시를 호쾌하게 누리는 목표 따위는 저물어가는 연휴와 함께 어영부영 사라지고 말았지만, 결국 이렇게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는 것이다. 도시가 한가해질 다음을 기약하며.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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