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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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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고통 없는 청춘의 연애여

천천히 따라 부르게 되는 옛 유행가 같은 드라마 tvN <응답하라 1994>…
‘누가 나정의 남편이 되었나?’라는 줄기로 재벌 드라마 요소에 일상적 느낌 덧씌워
등록 2013-11-06 15:10 수정 2020-05-03 04:27

잊고도 살 만한 이야기는 편안하다. 잊었다가 다시 생각나면, 아련하다. 어떤 노래로, 어떤 영화로, 어떤 인물로 문득 생각나는 시절. 지독한 그리움보다는 문득 스치는 아련함이 주는 편안함이 있다. 신원호 PD와 이우정 작가의 tvN 주말드라마 에는 그런 정서가 있다. 나만의 노래가 아니라 모두의 노래라 각별한 마음은 덜해도, 많은 날이 지나고 어디선가 문득 들리면 천천히 따라 부르게 되는 유행가 같은 드라마. 이것의 전작인 의 윤제(서인국)는 시원(정은지)을 다시 만나기 위해 살지 않았다. 어렵게 고백한 사랑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시원을 만나지 않아도 윤제는 대학을 다니고 사법시험을 치르고 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시원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복수를 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거나, 기업을 차지하기 위해서 끝없이 싸우거나, 출생의 비밀을 두고 암투를 벌이거나 하는 드라마에 지친 마음에 ‘응답하라’ 시리즈는 편안한 안식을 준다.

“오히려 멜로물 성격이 강해 보인다”

이번엔 ‘신촌하숙’이다. 경남 마산에서 올라온 나정(고아라) 가족은 서울 신촌에서 하숙집을 시작한다. 여기에 들어온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하숙생의 사투리 향연이 드라마의 첫인상이다. 처음엔 경상도 남자 ‘쓰레기’(정우)의 툭 불거진 팔뚝 혈관으로 시청자의 심박수를 올렸다. 서울역에서 하숙집까지 지하철 환승을 몰라 헤매고, 약삭빠른 택시 운전사를 만나 서울 시내 뺑뺑이돌기를 당한 삼천포(김성균)의 고달픈 상경기로 서울 사람 되기의 어려움은 시작됐다. 삼천포 장국영과 순천 해태(손호준)가 한방에서 한 이불을 덮으면서 영호남 사투리로 티격태격한다. 여기에 충북 괴산에서 올라온 빙그레(바로), 전남 여수 출신인 서태지 ‘빠순이’ 조윤진(민도희)까지 함께하는 하숙집 식탁은 전국 사투리의 전시장이 된다. 빙그레의 사촌으로 유일한 서출 출신인 칠봉이(유연석)도 식객으로 함께한다.

어찌 보면 뻔한 설정이다. 전국의 스무 살들이 서울 하숙집에 모인다. 사투리로 대화한다. 그러다 연애한다. 1994년과 2013년을 오가는 설정도 1997년과 2012년을 오갔던 전작과 다르지 않다. “이들 중 누가 나정의 남편이 됐을까?” 시원의 남편을 찾는 과정을 줄기로 놓았던 전작과 같다. 이렇게 ‘응답하라’ 시리즈는 전작의 그늘을 피하지 않으면서 나아간다. 어느새 시청률은 방송 2주 만에 케이블 방송 드라마로 예외적인 5%를 넘었다. 에 응답한 이들은 당시 없었을 물건이 나온 장면을 찾아 ‘옥에 티’를 만든다. 깨알 같은 관찰력으로 1994년 농구 전광판에 없었던 쿼터제 표시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 나정이 쓰는 화장품 디자인이 현재의 모델이라는 것을 추궁한다. 해태와 삼천포가 주문하는 햄버거가 1997년에 출시됐다는 사실도 놓치지 않는다. 이렇게 응답하라 시리즈는 ‘응사’ ‘응칠’이란 애칭을 얻으면서 팬덤을 형성했다.

청춘과 사투리, 드라마에서 잠시 물러나 있던 것들이 호출됐다.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1990년대 청춘물 이나 1980년대 후반 작품인 의 대학생들을 보면서 느꼈던 풋풋함이 에서 살아난다. 하숙집에서 낯선 이들을 만나고, MT를 가고 미팅을 하고 연애를 하는 일상을 통해 성장하는 스무 살들. 여기에 다른 요소를 크게 더하지도, 이야기를 비틀지도 않는다. 아직 그곳은 잉여와 왕따도 없는 세계다. 나정이 연세대 농구팀의 빠순이로 나오기는 하지만, 이런 ‘빠질’은 시대의 배경을 전하는 요소 정도다. 강명석 편집장은 “이른바 ‘빠순이’가 1997년 정서의 핵심에 가깝다면 에서 농구팀 빠순이는 무엇을 말하는지 불명확하다”며 “오히려 멜로물 성격이 강해 보인다”고 말했다.

캠퍼스보다 하숙집서 연애하는 청춘들

그러니까 캠퍼스라기보다는 하숙집에서 연애하는 청춘들 이야기다. 다시 상기하면, 남자 하숙생 5명 가운데 ‘누가 나정의 남편이 되었나?’, 드라마가 풀어가는 게임이다. 그런데 남편감 후보들 면면이 심상치 않다. ‘순천’은 시내버스 회사 사장 아들, ‘삼천포’는 “한번에 나가면 기름값 1500”은 드는 배를 가진 집의 아들, ‘빙그레’는 충청도에서 가장 큰 양계장을 하는 부모의 아들이다. ‘쓰레기’는 천재 의대생에, 야구선수 ‘칠봉이’는 고교 시절 봉황기대회에서 7경기 연속 완봉승을 거둔 대학야구 에이스다. 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연세대. 이렇게 화려한 스펙이 있지만, 촌놈들의 서울 적응기라는 장치는 이들의 이야기를 우리의 과거처럼 보이게 만든다. 강명석 편집장은 “재벌 드라마의 요소는 취하면서, 인물의 행동반경을 대학으로 설정해 일상적인 느낌을 덧씌웠다”고 분석했다.

‘응답하라 1994‘는 전라도·충청도·경상도에서 올라온 ‘촌놈들’의 사투리로 싸우고 연애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아정(고아 라·앞줄 왼쪽)의 남편은 뒤에 있는 남자들 가운데 누가 됐을까, 알게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tvN 제공

‘응답하라 1994‘는 전라도·충청도·경상도에서 올라온 ‘촌놈들’의 사투리로 싸우고 연애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아정(고아 라·앞줄 왼쪽)의 남편은 뒤에 있는 남자들 가운데 누가 됐을까, 알게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tvN 제공

고민은 있지만, 고통은 없다. 풀어 말하면, 사람에 대한 고민은 있지만 현실의 고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응답하라’ 시리즈를 관통하는 정서다. 의 윤제와 형은 고아지만, 이들에게 가난이 고통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형제는 능력자. 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고향에서 교사를 하며 같이 지내는 형은, 학교를 그만두자 천재 프로그래머로 명성을 떨치며 ‘I like school’ ‘사이랜드’를 만들어 벤처 갑부가 된다. 나중에 대통령 후보로도 나선다. 윤제도 공부도 1등, 운동도 1등. 시원이가 제복 입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꿈이라는 걸 알고 공군사관학교에 지원하지만 시력이 나빠 떨어진다. 그러나 그가 법대를 거쳐 판사가 되는 것은 힘들이지 않고 가능하다. 반에서 꼴찌를 맴돌던 시원이 팬픽을 쓰던 재능을 살려서 대학에 들어가는 것도 만화처럼 이뤄진다. 순정만화 같은 진행이다. 이렇게 일상으로 포장한 판타지는 ‘응답하라’ 시리즈에 이어진다. 그래서 의 명문대생, 이들의 미래가 그렇게 암담하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안심한다. 그리고 이들의 연애 고민을 즐기면 된다.

우리를 안심시키는 또 다른 요소는 가족이다. ‘응답하라’ 시리즈에 유일하게 계속해서 등장하는 인물은 아버지 성동일과 어머니 이일화다. 자식은 바뀌어도 부모는 바뀌지 않는다. 이들은 에서 윤제 형제 곁에서 부모 같은 역할을 했다. 실제 윤제 형제는 이들을 “어무이, 아부지”로 불렀다. 이어진 에서도 이들은 촌놈들의 서울 부모 구실을 한다. 실제 나정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랐던 이웃집 아이 ‘쓰레기’는 이들을 “어무이, 아부지”로 부른다. 거꾸로 쓰레기는 이들이 잃은 아들의 자리를 메우는 존재다. 서울에 올라온 아들을 걱정하는 삼천포의 어머니에게 하숙집 엄마가 “서울 친척집에 보냈다고 생각하이소”라고 하면 이것은 겉치레 말이 아니다. 그래서 신촌하숙은 “우리들의 첫 번째 서울집”이 된다.

예능 익숙해진 시청자와 통하는 이유
'응답하라 1997'은 사투리를 극의 중심으로 끌어들이고 '아이돌 빠순이'를 재조명하는 새로운 접근법을 선보였다. 빠순이 정서와 사투리의 향연은 '응답하라 1994'에도 이어진다. tvN 제공

'응답하라 1997'은 사투리를 극의 중심으로 끌어들이고 '아이돌 빠순이'를 재조명하는 새로운 접근법을 선보였다. 빠순이 정서와 사투리의 향연은 '응답하라 1994'에도 이어진다. tvN 제공

아직 가족은 해체되지 않았고, 가족의 옆에는 대리 부모와 유사 가족이 있다. 유일하게 칠봉이의 부모가 이혼했지만, 칠봉이는 서울 사람이다. 칠봉이는 친구의 부모를 “어머니, 아버지”로 부르는 호칭법에 동화된다. 이렇게 촌놈들이 서울에 적응하는 동안 서울 사람은 지방 문화에 스며든다. 한국인 대부분은 어디선가 ‘올라온’ 사람이란 정서를 가지고 있어서 는 보편적 호소력을 가진다. 대개는 “아무래도 난 돌아가야겠어~”, 드라마 음악을 따라하며 떠올리는 고향이 하나씩 있는 사람들이다. ‘응답하라’에서 음악은 추억을 자극하는 무기다. 여기서 ‘음악의 신’이 아니라 ‘음악은 신’이 되는데, 트위터에는 “한창 집중해서 보다가 BGM 나올 때마다 따라 부르느라 극의 흐름을 놓쳐버림. 진짜 BGM의 습격 ㅜ”(@delalocha) 같은 멘션이 올라온다.

의 주인공 이름은 ‘시원’이었다. 시원시원한 성격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지만, 시원(始原)의 추억이란 뜻으로도 읽힌다. 시원이가 결국 선택한 남자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옆에 있었거든” 하는 윤제였다. “징그러버 죽겠다”고 하면서도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같이 가는 사람은 윤제였다. 그런 윤제는 결국 인생의 동반자가 됐다. 의 나정이가 첫사랑을 고백하는 사람도 시원에게 윤제 같은 존재인 ‘쓰레기’다. 반복을 피하기 위해서 ‘쓰레기’가 나정의 남편이 될 가능성이 오히려 적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돌 빠순이의 시원인 1994년, 농구대잔치 빠순이의 전성기인 1997년으로 시계추가 돌아간 드라마에서 모든 것이 시작됐던 ‘시원’은 무엇보다 강력한 코드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재미는 디테일에 있다. ‘남자의 자격’을 만들었던 PD와 ‘1박2일’을 썼던 작가의 작품답게 예능감이 드라마에 살아 있다. 드라마의 만듦새가 매끈하지 않아도, 상황을 압축하는 어떤 장면들은 뛰어나다. 에서 H.O.T. 팬클럽과 젝스키스 팬클럽이 비를 맞으면서 ‘맞짱’ 뜨는 장면은 ‘아~ 그랬구나’ 하면서 스타들이 서로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예능 프로그램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예능에 익숙해진 시청자와 통하는 이유다.

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은 1등부터 47등까지 친구가 되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특목고, 예술고 같은 학교가 아이들을 나누기 전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 우리와 같은 이들의 연애 성장담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가 남긴 이야기가 있다. 무엇보다 은 자기 사랑만 쳐다보다 자기를 쳐다보는 사람은 모르는, 모르다 뒤늦게 깨닫는 이야기였다. 그것은 시원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윤제에게 끝내 사랑을 말하지 못했던 준희(호야)의 얘기였다. 그렇게 은 퀴어를 1990년대의 정서로 품었다. 깨알 같은 재미가 검증된 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그것이 나정의 남편이 누구냐, 이것보다 궁금하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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