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국극에 대한 첫인상은 강렬함이었다. 낡은 잡지 속, 남자인지 여자인지 성별조차 모호한 인물들이 짙은 화장과 화려한 전통복장을 한 채, 그윽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사진은 나의 마음속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남장여자? 여성국극? 1950년대? 대체 이건 뭐지? 이렇게 흥미진진한 소재를 어떻게 지금까지 모르고 살았지?
화려한 의상과 스펙터클한 무대, 그리고 남장여자의 묘한 매력을 특징으로 하는 여성국극은 1950년대 황금기를 누렸던 여성들만의 창극 공연이다. 남자들만 유세하는 전통 국악판에 염증을 느낀 여성 명창들이 1948년 여성들의 단체인 ‘여성국악동호회’를 만들었고, 이들이 올린 공연이 전국적으로 대히트를 치면서 여성국극은 시작되었다. 한국전쟁이 터졌지만 여성국극의 인기는 오히려 치솟았고, 1950년대를 관통하며 최고의 대중예술로 자리잡았다. 여성국극 배우를 지망하는 학생들로 인해 전국에 국악양성소가 생겨나고, 가출에 혈서, 자살 소동까지 벌이는 열혈팬들이 등장했다. 국악계는 물론 연극·영화판 사람들까지 유일하게 돈벌이가 되는 여성국극 무대로 몰려들었다.
그러던 여성국극이 어째서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조차 거의 없이 사라져버린 걸까? 창극사, 연극사, 영화사, 대중문화사 등 여러 문헌을 뒤져보았지만 그 대단했던 ‘인기’만을 언급할 뿐, 더 이상의 설명이나 분석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대중예술에 대해 이토록 빈약한 기록만 남아 있다는 사실에 의구심이 들었다.
사실 처음부터 다큐멘터리를 찍겠다고 계획한 건 아니다. 여성국극의 역사적 가치를 복원하고 여성들의 독특한 문화적 시도를 재조명해보자는 막연한 목표 속에 문화기획집단 ‘영희야 놀자’가 탄생했다. 2007년 여름의 일이었다. 독립적인 여성주의 문화경제 공동체를 꿈꾸며 언니네 커뮤니티(unninet.co.kr)를 만든 초기 멤버들이 절반의 성공만을 남긴 채(운영 방식을 바꾼 온라인 커뮤니티는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살아남았지만 멤버들의 경제적 자립은 요원했다)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진 지 5년이 지나던 때다. 새로운, 그리고 지속 가능한 여성주의 문화기획집단을 만들고픈 갈증이 다시 일던 시기에 여성국극은 우리를 다시 뭉치게 할 계기를 던져주었다. 그리고 하나둘, 같은 목마름을 가진 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여성국극에 대한 자료 조사를 하던 중 사라진 줄만 알았던 여성국극 공연이 여전히 무대에 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으로 여성국극 공연을 보았던 때를 잊을 수 없다. 무대 위 이몽룡과 변학도는 그들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수 없을 만큼 목소리와 몸짓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남자다웠다’. 여성국극 남장 여배우의 매력이 이 정도인가 한 번 놀라고, 그들이 전성기 시절부터 지금까지 계속 무대에 오르고 있는 70~80대 배우들이라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살아 계실지 의문이던, 자료에서 본 전설 같은 배우들이 눈앞에 있었다. 이들을 영상에 담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이 더 흘러 유일한 여성국극의 산증인들이 사라지고 나면 여성국극은 역사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게 될 게 뻔해 보였기 때문이다.
여전히 활동 중인 7080 전설의 배우들처음 본 에서 이몽룡을 연기했던 이옥천 선생님의 소개로 여성국극보존회에 나가면서 더 많은 배우와 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보존회 모임 또한 강렬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동네 잔치판에라도 온 듯, 수십 명의 할머니들이 돗자리 펴고 가지가지 음식 놓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데, 화사한 차림새에 목소리는 할아버지다. 게다가 인사를 하고 보니 이름으로만 알던 유명 배우들이다! 칼싸움의 대가인 조금앵, 여전히 팬클럽이 5개나 된다는 박미숙, 변학도 같은 악역을 도맡아 한 허숙자, 여성국극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진경여성국극단에서 언니들인 김진진·김경수와 함께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김혜리. 판소리 인간문화재이면서 국악계 원로인 이옥천 선생님이 이곳에서는 60대라는 어린(?) 나이로 ‘막내’를 자처하며 다른 선생님들을 모시고 있었다.
다큐멘터리에 담고 싶은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으니 일사천리로구나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남들이 다큐멘터리를 몇 년에 걸쳐 만들었다고 할 때는 속으로 ‘뭘 그리 오래 찍나’ 했는데, 막상 찍다보니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낯선 세계에 처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서 듣고, 이해하고, 친해지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전혀 다른 세대와 소통한다는 게 어떤 건지 잘 몰랐다. 인터뷰를 하다보면 동문서답은 기본에 말바꾸기는 보통이다. 국극을 처음 본 무대가 어느새 남자 주연으로 명성을 날린 공연으로 바뀌어 있는가 하면, 결혼하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아들 자랑으로 이어졌다. 출연한 공연 이름이나 연도도 인터뷰 때마다 바뀌기 일쑤고, 심지어 나이마저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말귀를 알아듣기까지
가장 기본적인 인터뷰 약속을 잡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배우로 살아온 분들이라 인터뷰니 카메라니 하는 것에 거부감은 없었지만, 짤막한 대외용 인터뷰를 해주고는 “이 정도면 됐지 뭘 더 찍어” 하며 더 깊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우리를 경계하기도 했다. 당시 최고령 배우였던 조금앵 선생님(안타깝게도 지난해 8월 별세하셨다)은 우리와의 약속을 잊고 외출하시는 바람에 경기도 수원까지 갔다가 발걸음을 되돌린 적도 있다.
배우들의 인터뷰는 언제나 흥미진진했지만, 한편으로는 정확한 사실 확인이 되지 않고 의사소통이 원활치 않아 답답했다. 그런데 사실 답답한 쪽은 ‘말귀를 못 알아듣는’ 우리였다. 사람의 기억이란 우리 생각만큼 연대기순으로 되어 있지도 않고, 1950년대 사람들의 삶의 모습 역시 지금이랑은 많이 달랐다. 주민등록제도조차 1960년대에 생겨난 제도니, 실제 나이와 호적상 나이가 다른 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삼마이니 가다키니 하는, 일본말이 절반은 섞인 용어들을 알아듣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우리는 선생님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선생님들은 우리가 질문하는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니, 대화가 미끄러지는 건 당연했다.
나름으로 여성주의적 시각을 가졌다고 자부하던 우리지만 가족이니 성정체성이니, 성별 역할에 대해 지식으로만 아는 것과 실제로 깨우치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굳어진 편견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다큐를 만드는 동안 통렬하게 자각해야 했다. 남자 주연을 오래 했던 조금앵·이옥천 선생님에게 ‘남자로 태어나야 했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지 물어볼 때마다 그들이 지었던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떠오른다. 여자로 태어나서 남자 역까지 잘한다는 게 대단한 거지, 남자가 남자 역할 잘하는 게 뭐 대수냐는 그런. 무대 위에서든, 실생활에서든 여성국극의 남자 역 배우들은 대리남성으로서의 남장여자가 아니라 남자이면서 여자인, 남녀를 넘나드는 “묘한 매력”의 존재로서 자부심을 가졌고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들은 남성성과 여성성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연기’될 수 있고 공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지식이 아닌 온몸으로 말해준다. 그렇기에 다큐 속 김혜리 선생님의 말처럼 “남자 같은 애가 여자 역을 하고 싶어” 하거나 반대로 “예쁘고 여자 역에 어울릴 애가 남자 역을 멋지게 해내는” 일도 여성국극에서는 자연스러웠다.
영화를 완성하고 영화제 등에서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할 때 “제작진이 전형적이고 의도적인 질문을 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정확히 맞는 지적이다. 편집 과정에서 많이 고민했으나 우리가 얼마나 멋모르고 여성국극이라는 세계에 뛰어들었는지, 그래서 얼마나 멍청한 질문을 던졌는지 보여주는 것이 관객에게 또 하나의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일이라 생각했다. 지금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인터뷰도 있지만, 그것이 당시 우리의 수준이었고, 어쩌면 많은 이들이 가진 편견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성국극 배우와 팬들의 만남은 끊임없이 새로운 영감과 자극을 불러일으키며 우리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었으나, 영화를 완성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것은 역사 다큐인가, 인물 다큐인가? 인물은 너무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무엇 하나 버리지 못했고 제대로 표현하기에는 능력이 부족했다. 편집이 수십 번 바뀌어도 여전히 블랙홀이었다. 과연 이 영화는 완성될 수 있을까? 감독이 골방에서 삽질하는 동안 초반에 영화진흥위원회·서울영상위원회 등의 지원을 받은 제작비도 다 떨어지고, 제작진들의 인내도 한계에 이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감독을 버리지 않고 무한한 인내심으로 견디며 제작비 마련에 나섰다.
소녀들의 공동체는 어떻게 되었을까5년이라는 제작 기간을 고려하면 의 제작비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함정은 인건비가 거의 책정되지 않았다는 것. 각자 알아서 생계를 해결하며 빠듯하게 제작비를 썼지만 후반 작업을 하려면 또 돈이 필요했다. 다행히 ‘영희야 놀자’의 감수성을 지지하고 여성국극을 궁금해하는 것만으로 완성도 되지 않은 영화를 위해 선뜻 지갑을 연 수많은 후원자가 있었다. 이 후원자들과 영화 제작 짬짬이 돈이 될 만한 외부 프로젝트를 한 ‘영희야 놀자’ 팀원들 덕에 은 무사히 완성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서른 살을 훌쩍 넘은 여자들이 아무 경험도 없이 무작정 다큐를 시작하겠다고 나선 게 참 겁도 없다 싶다. 영화가 완성되고 영화제에 한 번 올리는 일조차 만만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때에야 우리 영화가 블록버스터라는 망상을 버렸지만, 시기를 놓치고 배급사를 잡지 못해도 별로 절망하지는 않았다. 영화를 보고 매력을 느낀 이들이 함께하고 싶다며 새로이 찾아들었고, 이제는 직접 개봉까지 하겠다고 나섰다.
‘좋으면 그냥 한다’는 단순무식함이야말로 반세기의 시간을 넘어 우리가 여성국극 배우들과 정서적으로 공유하는 행동 방식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정말로 우리가 궁금했던 건, 한 시대를 풍미하며 공동체를 이루었던 여성 예술가들이, 아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던 철부지 소녀들이 나이 들어서는 과연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점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미래일지 모를 그들의 현재 모습은 우리에게 희망과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짧은 영광의 순간 뒤로 기나긴 쇠락의 시간을 견디면서도 식지 않은 열정과, 하고 싶은 건 후회 없이 다 해봤노라 큰소리치는 당당함, 전국 방방곡곡을 넘어 세계 각지로 퍼져 있는 배우와 팬들의 공동체가 다르게 살아도 외롭지 않게, 또 불행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해준다.
이처럼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사는 즐거움’을 다른 이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은 마음, 그게 바로 우리가 개봉을 하는 이유고, 여성국극 배우들이 노령에도 여성국극의 부활을 외치는 이유가 아닐까. 4월18일 서울 광화문 인디스페이스로 부디 보러와 주시길.
김혜정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