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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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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날 수 있다, 싸게

2012년 저가항공 승객 24% 늘어나면서 국제선 이용객 95.6% 증가… ‘너무 싸고 좋았다’ ‘다시는 타지 않겠다’ 사이에서 만족도는 춤을 추지만 덕분에 ‘이동의 민주주의’ 확장
등록 2013-04-12 20:35 수정 2020-05-03 04:27

누구는 그걸 ‘만우절 이벤트’라 불렀지만, 혹시나 하는 이들은 역시나 몰려들었다.
만우절 다음날인 4월2일 새벽 1시, ‘Free Seat’(공짜 항공표)란 이름을 단 에어아시아 프로모션이 시작됐다. 인터넷 접속 속도가 빠른 동네 PC방에 정좌하고 에어아시아 홈페이지(airasia.com)에 들어간다. 역시나 접속량이 폭주한다. 예약이 가능한 페이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 ‘대기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our waiting room)란 메시지가 뜬다. 1초씩 줄어드는 15초의 대기시간 표시가 반복되고 반복된다. 역시나 접속에 실패한다.

956호 레드기획

956호 레드기획

송윤아 제치고 할인항공권이 1위

같은 시각 컴퓨터의 다른 창으로 네이버에 접속한다. 0시57분,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 3위 송윤아, 4위 에어아시아. 이날 밤, SBS 에 송윤아씨 남편 설경구씨가 나와서 이혼과 결혼 관련 소문을 해명한 뒤다. 0시59분, 에어아시아가 송윤아를 제치고 검색어 3위에 오른다. 1시14분에는 이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배우 김수진에 이어 검색어 순위 2위가 된다. 네이버에 한눈팔다가 에어아시아 접속창을 클릭하니, 어, 검색이 된다. 2014년 2월10일 인천~쿠알라룸푸르 9만9천원, 2월26일 쿠알라룸푸르~인천 8만2천원 티켓이 뜬다. 따로 부치는 수하물, 좌석 지정 요금을 더해도 25만원도 안 들이고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다녀올 수 있겠다. 더구나 쿠알라룸푸르에서 왕복하는 말레이시아 국내선, 타이·인도네시아 국제선 상당수는 프로모션 기간에 사면 공항세와 유류할증료만 내면 된다. 잘하면 30만원 좀 넘게 내고 타이 푸껫,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도 갔다올 수 있다. 물론 인터넷 접속의 축복과 연결편 시간의 운대가 맞아야 가능한 일이지만 말이다. 아, 이날 프로모션은 2014년 1월1일~4월30일 비행편을 팔았다. 그렇다, 내일 일도 모르는 이들에겐 그림의 떡일 뿐이다.

지금은 이벤트 요금도 꽤 비싸져 ‘에어낚시아’ 같은 비호감 별명을 얻었지만, 두어 해 전엔 이렇게 피 터지는 전투를 치르지 않아도 되었다. 2011년 추석 연휴, 겨울 3박4일 휴가를 에어아시아 티켓으로 다녀온 적이 있다. 쿠알라룸푸르까지 추석에 25만원, 겨울에 16만원 들었다. 심지어 2010년 에어아시아 인천~쿠알라룸푸르 취항 기념 프로모션 때는 7만~8만원짜리 왕복 항공권도 있었다. 서울~부산 KTX 왕복값이면 비행기로 6시간30분 걸리는 곳에 놀러가던 호시절이었다. 요즘엔 이벤트라 해도 웬만하면 30만원대이니 ‘에어낚시아’ ‘만우절 이벤트’ 같은 불만이 터진다.

에어아시아, 피치항공, 세부퍼시픽(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홈페이지에서 때로 저렴한 항공권 세일을 한다. 이런 행사 기간을 빼면 저가항공은 대략 일반적인 항공권 가격의 70~80% 수준에서 판매된다. 다만 환불 불가인 경우가 많으니 주의해야 한다. 에어아시아 홈페이지 갈무리, 세부퍼시픽 홈페이지 갈무리, 피치항공 홈페이지 갈무리

에어아시아, 피치항공, 세부퍼시픽(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홈페이지에서 때로 저렴한 항공권 세일을 한다. 이런 행사 기간을 빼면 저가항공은 대략 일반적인 항공권 가격의 70~80% 수준에서 판매된다. 다만 환불 불가인 경우가 많으니 주의해야 한다. 에어아시아 홈페이지 갈무리, 세부퍼시픽 홈페이지 갈무리, 피치항공 홈페이지 갈무리

해마다 필리핀, 티켓값은 거의 0원

‘세부마을버스’라는 말이 있다. 세부퍼시픽(cebupacific-air.com) 항공을 타고 필리핀 세부 등에 자주 다니는 이들이 농담처럼 하는 말이다. 마을버스처럼 좌석이 좁고, 출발 지연이 잦아 붙은 별명이다. 에어아시아·세부퍼시픽 같은 외국계 저가항공사는 기내식을 무료로 제공하지 않는다. 출발 전에 인터넷으로 따로 비용을 내고 기내식을 신청하거나 기내에서 유료로 파는 음식을 사야 한다. 승무원이 음식과 음료가 담긴 카트를 밀고 다니며 파는데, 일부 짓궂은 이들은 승무원이 허리에 찬 잔돈 가방을 ‘복대’라 부른다. 노련한 저가항공 이용자들은 기내에서 파는 음식이 비싸 공항에서 햄버거, 김밥 등을 사서 타기도 한다. 저가항공의 ‘저렴한 맛’은 중독성이 강하다. 필리핀 방문을 ‘방필’이라 하는데, 1년에 여러 차례 ‘방필’을 하는 이도 적잖다. 아예 포털에는 ‘에어아시아 타고 가는 쿠알라룸푸르 투어’ ‘세부퍼시픽 프로모를 원하는 사람들의 모임’ 같은 카페도 있다.

서울에 사는 직장인 홍지민(36·가명)씨는 2009년 결혼하고 해마다 남편과 함께 필리핀을 다녀왔다. 5번의 필리핀 여행 중 4번이 ‘세퍼’였다. 2009년엔 1인 왕복 20만원, 2010년엔 10만원 정도의 항공료가 들었다. 이것도 공항세·유류세를 포함한 금액이니 2010년엔 사실상 티켓값이 ‘0’이었던 셈이다. 저렴한 항공권은 이들의 취미에 영향을 끼쳤다. 바다가 좋은 필리핀에 자주 가니 다이빙에 빠지게 됐다. 이렇게 우연히 탄 비행기는 우리를 미지의 세계로 이끌고 경험의 지도를 새로 그리게 한다.

‘세퍼 자세’라는 것이 있다. 저가항공이라도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세부퍼시픽은 유난히 비행기 좌석의 앞뒤 간격이 좁은 편이다. 몸집이 큰 편인 홍씨의 남편이 좌석에 바른 자세로 앉으면 무릎이 앞자리에 닿는다. 세부까지 4시간 넘게 비스듬히 앉아 가야 한다. 더구나 좌석이 뒤로 젖혀지지 않아 심신의 고통은 더하다. 여전히 세부퍼시픽 프로모션 가격은 경쟁력이 세지만, 예전만은 못하다. 아무리 ‘1페소(약 30원) 프로모션’에서 득템해도 결제할 금액은 15만원을 넘는다. 유류세와 공항세가 올해 들어 부쩍 오른 탓이다. 세부퍼시픽 프로모션이 포털의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 1위를 차지할 만큼 알려져 있어 경쟁이 치열하다. 그래서 홍씨는 “지금은 정신 건강을 위해 아예 관심을 끊었다”고 전한다.

그렇다고 저가항공이 무조건 불편한 것은 아니다. 사실 비행의 ‘퀄리티’는 탑승률에 크게 좌우된다. 저가항공이 아니라도 탑승률이 높으면 기내가 답답하고 저가항공이라도 탑승률이 낮으면 공기가 산뜻하다. 기자는 최악과 최고의 비행 경험을 모두 저가항공을 탔을 때 했다. 2011년 9월, 쿠알라룸푸르에서 서울로 오는 에어아시아 비행기에서 숨 막히는 경험을 했다. 쿠알라룸푸르 새벽 1시 출발에 서울 아침 8시 도착 비행기였는데 하필이면 만석이었다. 좌석 간격이 좁은 저가항공에 사람이 빽빽하니 밤새 공기는 답답하고 몸은 뻣뻣하고 죽을 맛이었다. 2009년에는 타이 푸껫에서 싱가포르로 가는 저가항공 젯스타(Jetstar.com) 비행기를 탔는데, 2시간을 비행기에 갇혀 있어야 했다. 승객이 모두 탔지만, 정비에 문제가 있다며 이륙을 늦춘 것이다. 1시간이 지나자 답답한 비행기 안 여기저기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반면 2012년 12월 세부퍼시픽을 탔을 때는 자리가 비어 눕기도 했다. ‘이렇게 싸고 이렇게 좋다니’ 졸면서도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렇게 저가항공 탑승 경험은 ‘양극화’ 경향이 있다. 너무 싸고 좋았다, 다시는 타지 않겠다, 사이에서 춤춘다.

인천공항에서 출국을 기다리는 사람들. 지난해 저가항공을 타고 해외로 떠난 이들이 359만 명에 이른다. 성장세는 앞으로도 이어질 전망이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인천공항에서 출국을 기다리는 사람들. 지난해 저가항공을 타고 해외로 떠난 이들이 359만 명에 이른다. 성장세는 앞으로도 이어질 전망이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저가항공이 비행기를 자주 타는 사람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다리가 불편한 시어머니는 예순다섯에 처음 외국에 나가보았다. 서울에 사는 정혜주(38·가명)씨는 지난해 가을 일본 후쿠오카로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남편과 함께 시부모를 모시고 다녀온 여행은 국적 저가항공을 이용했다. 서울~후쿠오카 왕복 항공료는 1인당 15만원이 들었다. 유류세 등을 빼면 6만원짜리 티켓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내릴 때, 항공사 직원이 시어머니가 탄 휠체어를 밀고 가는 안내 서비스도 해줘서 더욱 만족스런 여행이었다. 저가항공의 등장으로 비용 부담이 줄면서 여행을 떠나는 이가 늘었다. 국토해양부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국적 저가항공사 승객이 2011년 1052만 명에서 2012년 1306만 명으로 24.1% 늘었다. 국제선을 이용한 사람은 2012년 359만 명으로 2011년 183만 명에 견줘 95.6% 증가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제주항공·이스타·진에어·티웨이·에어부산 등 국적 저가항공이 생겼다. 이들의 항공시장 점유율은 2011년 16.5%에서 2012년 18.8%로 늘었다. 이렇게 저가항공은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일본과 제주도는 국적 저가항공이 생기면서 부쩍 여행이 잦아진 곳이다. 서울에서 오사카로 가는 비행기는 제주항공·이스타가 띄운다. 여기에 오사카 기반의 일본 저가항공사 피치항공(flypeach.com)도 있다. 서울~오사카 노선에는 제주항공·티웨이가 있다. 제주항공은 서울에서 나고야도 취항하는데, 지난 3월 말 국제선 300만 명 탑승 기념으로 내놓은 이벤트의 나고야 왕복 티켓 가격은 3만원. 여기에 유류세 등을 더한 항공료는 14만6100원이었다. 국제선에서는 간단한 기내식과 음료수를 제공하는 ‘한국형 저가항공’은 외국 저가항공에 견줘 파격적인 할인이 부족한 편이지만, 상황은 변하고 있다. 더불어 한국에 취항하는 외국 저가항공도 늘고 있는데, 지난해 에어아시아가 서울~도쿄 노선에 취항했고 오는 6월 서울~싱가포르 노선에 싱가포르 저가항공사 스쿠트(flyscoot.com)가 비행기를 띄운다. 다양한 저가항공사가 취항하면서 제주도로 가는 항공료는 평일의 경우 예전에 견줘 절반으로 떨어졌다. 제주도가 ‘뜨는’ 여행지가 된 배경에는 저가항공의 등장도 있다.

제주도와 부산, 아시아에서 ‘핫’해지다

비행기가 오고 가면 관계도 맺어진다. 에어부산은 부산~타이베이 노선에 취항하고 있다. 원래 대만 항공사인 부흥항공이 취항하는 노선이긴 했지만, 에어부산이 가세하면서 항공료가 싸졌다. 지난 4월4일 부산역 출구에 ‘푸통푸통 24시 타이완’ 광고가 붙어 있었다. 한국 배우 조정석과 대만 배우 천이한이 등장하는 이 홍보물은 대만 관광청에서 만든 것이다. KTX를 타러 간 서울역에는 없던 홍보물이 왜 여기에 붙었나 싶었는데, 에어부산 관계자들이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부산~타이베이 비행편이 늘면서 오가는 이가 늘었고, 지난해 대만 관광청이 에어부산에 상도 줬다고 한다. 2011년 ‘희망버스’ 때문에 부산에 왔을 때, 거리에 중국어를 쓰는 관광객이 드물지 않았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이렇게 우리를 둘러싼 아시아 도시의 관계 지도는 저가항공의 가세로 조금 빠르게 변하고 있다.

사실 항공업계에서는 저가항공을 ‘저비용항공’이라고 부른다. LCC(Low Cost Carrier)의 번역인 셈이다. 저가항공사는 비행기의 운항 효율을 높이고 인건비를 절감해 항공료를 낮춘다. 예컨대 낮 시간에 서울~제주를 운항하던 비행기를 심야에 서울~방콕 노선에 투입해 효율을 높이는 식이다. 여기에 기내식 등 서비스를 줄이고 승무원이 청소도 해서 인건비를 절감한다. 국적 저가항공사는 국제선 비행기도 통로 좌우에 3개씩 좌석이 있는 작은 비행기를 쓰는데, 비행 시간이 5시간 안쪽인 노선이 많다. 국제선이 일본·중국에 이어 괌·필리핀 등에 집중된 이유는 이곳까지 비행 시간이 4시간여로 짧기 때문이다. 아시아 저가항공의 좋은 점은 또 있다. 유럽의 저가항공 공항(LCCT·Low Cost Carrier Terminal)은 대부분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교통편도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반면 아시아의 저가항공 공항은 근접성이 좋은 편이다. 더구나 LCCT가 따로 없는 경우도 많아 가기에 편하다.

난생처음 눈을 본 사람들

‘Everyone Can Fly’(모두가 날 수 있다). 에어아시아의 슬로건이다. 실제 타이 등에서 할인 항공권 가격이 버스비만큼 싼 경우도 있으니 완전히 공허한 말은 아니다. 2011년 12월, 쿠알라룸푸르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 안은 짐작과 달랐다. 한국인보다 말레이시아 사람이 훨씬 많아 보였다. 인천공항에 내리자 마침 퍼붓는 눈을 보느라 그들은 입국 수속도 미룬 채 공항 안에 서 있었다. 아마 저렴한 항공권이 있어 난생처음 눈을 볼 경험을 얻은 이도 있었을 것이다. 저들처럼, 저가항공을 몰랐다면 말레이시아와 필리핀은 내 경험의 지도에 훨씬 늦게 편입됐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가항공 덕분에 이동의 민주주의, 하늘 위의 평등이 조금 확장된 것처럼 보였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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