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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

칼럼을 시작하며
등록 2013-03-23 07:32 수정 2020-05-03 04:27
한겨레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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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로 지내다 최근 대기업에 경력 입사한 언니 한 분이 “권유를 받아들인 내가 바보지” 하며 크게 분개했다. 대표적인 불만 한 가지만 얘기해보라니까 “왜 회사가 내 아랫도리까지 단속하려 드느냐”고 했다. 3대 윤리강령 중에 정직이 있고, 그 범위에 사내연애 금지 규정이 있단다. 예전 직장에도 비슷한 규정이 있었고, 자칫 업무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취지도 이해하고 있었지만, 기분이 나쁘단다. 들키면 영락없이 권고사직이란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 (한스 팔라다 지음·씨네21북스 펴냄)에선 노부부가 히틀러의 정체를 ‘폭로’하는 글을 배포하다 게슈타포에 붙잡힌다. 소설 말미에 ‘국민재판’이라 지칭되는 법정 장면이 길게 나온다. 검사가 노부인에게 결혼 전까지 몇 명의 남자와 관계를 가졌느냐고 묻는다. ‘국민재판장’이 사건과 관련 있다고 노부인에게 대답하라고 다그친다. 정직한 노부인은 “여든일곱 명이오”라고 대답했다. 검사는 피고가 숫자를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동시에 (애초 의도대로) 그녀의 파렴치함과 타락을 질타한다.

기업 또는 국가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연애(섹스)는 곧잘 희극적인 희생을 강요당한다. 누군가의 희생에는 누군가의 이익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단순 셈법에 따라,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았으나 내게 평생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이 있었다. 엥겔스의 이다.

제목이 뇌 속에서 접수되는 순간, 직감했다. 자본주의 원리와 국가의 물리력이 실은 일부일처제라는 가족제도와 밀접히 관련 있음을 계보학적 또는 실증적 또는 구라로 탐사한 책이라는 것을. 제목을 보고 내용을 파악했으니 굳이 책을 살 필요도, 읽어볼 이유도 없었다. 문제는 이 명제가 내 종교가 된 것이다. 첫 직장의 입사 동료 가운데 유일하게 비혼자로 버틸 수 있었던 힘이다. 내 종교는 수십 년째 흔들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예컨대 삼성전자와 애플의 경쟁력이 화제가 되면 나는 이런 상상을 한다. ‘삼성전자 이재용의 어머니가 홍라희인 건 분명한데, 만약 그 아버지가 이건희인지, 이명박인지, 이성욱인지 알 수 없다면…. 친부를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사회라면….’ 소유와 경영과 상속의 처절한 분리는 삼성전자의 경쟁력을 지속 가능한 눈덩이로 만들 것이라는 상상에 이른다.

지구 위에는 대략 70억 개의 별이 산다. 그 별이 환히 빛나는 순간은 별끼리 만나서 사랑을 나눌 때다. 오 선생(오르가슴)이 동반하면 축포 소리도 들린다. 불행히도 환경친화적이며 지속 가능한 오 선생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절망할 수 없는 그 욕망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

이성욱 씨네21북스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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