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미대 회화과 동창인 두 여자가 10년 만에 프랑스 파리에서 만났다. 그들은 15년 전에 함께 프랑스 유학을 준비했다. A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맞아 부모의 짐도 덜 겸 교사임용시험으로 방향을 바꿨다. B는 예정대로 프랑스로 건너가 원하는 공부를 시작했다. A가 그림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과 다른 친구들은 전업으로 그림을 그리기보다 생활의 불안감을 덜어줄 일자리를 먼저 만들거나 유학길에 올라 일생을 지속할 그림 작업의 기반을 닦고자 했다.
A는 무난히 교직 생활을 시작했고 동료 아티스트와 결혼했으며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전시회도 열었고 갤러리에서 잇따른 전시 제의도 받았다. 그사이 B는 파리의 워크숍에서 만난 연하의 파리지앵 아티스트와 동거에 들어갔다. 곧 이들의 예술활동은 난항을 겪기 시작했다. A는 작품활동과 병행하기에 교직이 녹록지 않음을 알게 된 터에 남편과의 불화가 겹쳤다. B는 남녀 모두 전업작가로 일하는 탓에 기나긴 생활고가 시작됐다.
A를 힘들게 한 건 남편과의 불통이었다. 섹스리스임은 물론이었다. 수년의 갈등 끝에 이혼을 결심했고 합의를 끌어내는 데 또 수년이 걸렸다. 그림은 사실상 손을 놔야 했다. A의 곁을 지키며 위로해준 건 반려동물이었다. B는 동거 뒤 결혼이라는 프랑스식 절차를 밟았으나 파리 외곽으로 집을 거듭 옮기며 고전했고 향수병에 시달렸다. B를 견디게 해준 건 미소를 잃지 않는 프랑스 연하남과의 소통이었다. 어머니도 예술가인 가풍의 영향인지 돈이나 화려한 유행보다 열린 감각, 새로운 시선을 귀하게 여기는 감성이 배어 있는 남자였다.
그들이 올해 10년 만에 만날 수 있었던 건 각자의 반전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A는 새로운 연인을 만났고 섹스와 그림을 다시 시작했다. B는 남편이 2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그림과 병행할 수 있는 일을 얻었다. 특히 시가 임대하는 미술가 전용 레지던스를 얻어 넉넉한 작업실을 확보했다. B는 A를 초대할 여유와 재워줄 공간이 생겼고, A 역시 마음의 여유가 생긴 터라 대학 배낭여행 이후 가장 긴 여행길에 올랐다.
이들의 첫 일정은 퐁피두센터를 찾아 시몬 한타이 전시를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A는 파리 근교에 있는 고흐의 무덤을 찾았다. 19세기 말 고흐가 를 그린 그 밀밭(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여행 오기를 참 잘했다고 기뻐했다. “대학 때 구상을 고집하자 교수님들이 촌스럽다고 그렇게 구박하더니 요즘에 한국은 구상이 주류야. 추상과 구상이 공존하면 좀 좋아.” A는 구상, B는 추상 쪽의 그림을 일관성 있게 밀어붙이고 있다.
그들의 반전이 가능했던 건 나름의 세상살이 방식을 지켜온 덕이다. 이성을 선택하고 소통하고 있느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기준은 세상과 교류하는 방법과 다르지 않다. 두 여자가 고르거나 버리는 그림과 사랑은 동전의 앞뒤처럼 붙어다닐 것이다.
이성욱 씨네21북스 기획위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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