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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의 앞뒤, 그림과 사랑

파리에서 만난 두 여자
등록 2013-08-21 14:07 수정 2020-05-03 04:27

올여름, 미대 회화과 동창인 두 여자가 10년 만에 프랑스 파리에서 만났다. 그들은 15년 전에 함께 프랑스 유학을 준비했다. A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맞아 부모의 짐도 덜 겸 교사임용시험으로 방향을 바꿨다. B는 예정대로 프랑스로 건너가 원하는 공부를 시작했다. A가 그림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과 다른 친구들은 전업으로 그림을 그리기보다 생활의 불안감을 덜어줄 일자리를 먼저 만들거나 유학길에 올라 일생을 지속할 그림 작업의 기반을 닦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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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는 무난히 교직 생활을 시작했고 동료 아티스트와 결혼했으며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전시회도 열었고 갤러리에서 잇따른 전시 제의도 받았다. 그사이 B는 파리의 워크숍에서 만난 연하의 파리지앵 아티스트와 동거에 들어갔다. 곧 이들의 예술활동은 난항을 겪기 시작했다. A는 작품활동과 병행하기에 교직이 녹록지 않음을 알게 된 터에 남편과의 불화가 겹쳤다. B는 남녀 모두 전업작가로 일하는 탓에 기나긴 생활고가 시작됐다.

A를 힘들게 한 건 남편과의 불통이었다. 섹스리스임은 물론이었다. 수년의 갈등 끝에 이혼을 결심했고 합의를 끌어내는 데 또 수년이 걸렸다. 그림은 사실상 손을 놔야 했다. A의 곁을 지키며 위로해준 건 반려동물이었다. B는 동거 뒤 결혼이라는 프랑스식 절차를 밟았으나 파리 외곽으로 집을 거듭 옮기며 고전했고 향수병에 시달렸다. B를 견디게 해준 건 미소를 잃지 않는 프랑스 연하남과의 소통이었다. 어머니도 예술가인 가풍의 영향인지 돈이나 화려한 유행보다 열린 감각, 새로운 시선을 귀하게 여기는 감성이 배어 있는 남자였다.

그들이 올해 10년 만에 만날 수 있었던 건 각자의 반전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A는 새로운 연인을 만났고 섹스와 그림을 다시 시작했다. B는 남편이 2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그림과 병행할 수 있는 일을 얻었다. 특히 시가 임대하는 미술가 전용 레지던스를 얻어 넉넉한 작업실을 확보했다. B는 A를 초대할 여유와 재워줄 공간이 생겼고, A 역시 마음의 여유가 생긴 터라 대학 배낭여행 이후 가장 긴 여행길에 올랐다.

이들의 첫 일정은 퐁피두센터를 찾아 시몬 한타이 전시를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A는 파리 근교에 있는 고흐의 무덤을 찾았다. 19세기 말 고흐가 를 그린 그 밀밭(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여행 오기를 참 잘했다고 기뻐했다. “대학 때 구상을 고집하자 교수님들이 촌스럽다고 그렇게 구박하더니 요즘에 한국은 구상이 주류야. 추상과 구상이 공존하면 좀 좋아.” A는 구상, B는 추상 쪽의 그림을 일관성 있게 밀어붙이고 있다.

그들의 반전이 가능했던 건 나름의 세상살이 방식을 지켜온 덕이다. 이성을 선택하고 소통하고 있느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기준은 세상과 교류하는 방법과 다르지 않다. 두 여자가 고르거나 버리는 그림과 사랑은 동전의 앞뒤처럼 붙어다닐 것이다.

이성욱 씨네21북스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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