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쫓아다닌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생일날, 그녀의 집에서, 그녀와 둘이 아침을 맞이하기도 했으니 나에게 호감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좀체 불이 붙지 않았다. ‘총각은 유부남의 경쟁력을 당해낼 수 없다니까’라며 나를 면박 주던 그녀의 지적질에 심각하게 고민했다. ‘정녕 결혼부터 해야 하는 걸까?’ 그녀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깨닫지 못한채 만남이 끝났다. 몇 년 뒤 그녀의 절친과 우연히 만났다. 그녀는 당시 싱글인 나를 위해 또 다른 절친과 만나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특이한 방식을 제시했다. 크리스마스이브 자정 무렵에 술을 잔뜩 먹여놓을 테니 전화하면 냉큼 달려오란다. 왜? ‘취한 그녀와 일단 자고 시작하라’는 거였다! 워낙에 그녀가 무소불위 화법을 구사하는 대인배인지라 지지 않으려고 받아넘겼다. “전화만 해.”
크리스마스이브, 술에 반쯤 절여진 밤 12시쯤 휴대전화가 울렸다. “지금이야, 얼렁 와.” 여기도 여자들 많아, 라고 변명하며 선의로 가득 찬 유혹을 내쳤다. 다음날, 불현듯 깨달았다. 오래전 그녀가 유부남 우월론을 외쳐야 했던 진심 중의 하나를! ‘연애는 타이밍이다’는 참명제다. 다만, 이 명제가 살아 숨 쉬는 건 각자의 타이밍이 스킨십을 통해 우리의 타이밍으로 합일될 때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 다섯 개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술을 함께 마셔놓고도 손가락 하나 대지 못했다. 나의 숙맥질을 지켜봤을 그녀의 절친이 오죽 답답했으면 ‘잠부터 자라는 소개팅’을 떠올렸을까. 생각해보니 호감을 확인하고도 스킨십의 타이밍을 맞추지 못해 불발된 사례가 내 인생에 여럿이다.
연애는 마음을 확인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스킨십에서 비롯한다는 걸 잘 명심하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크나크다. 상대방은 내 심장이 쿵쾅거리는 걸 이미 듣고 있다. 상대방은 내 손과 입술이 들썩이는 걸 이미 보고 있다. 쿵쾅과 들썩을 받을 기미인데 용기를 내지 못하면, 불씨는 사그라진다. 쿵쾅과 들썩을 외면하고 있는데(상대방이 이미 듣거나 보고 있듯이 외면당하는지 아닌지는 스스로가 벌써 느끼고 있다!) 들이밀면 사달이 난다.
스킨십의 타이밍 맞추기가 워낙 어렵긴 하다. 그래서 인류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고 믿는다). 떼춤이건 커플춤이건 손끝이 어디엔가 닿기 마련이다. 닿으면 쿵쾅과 들썩을 확인하기가 수월해진다. 가장 잘 진화된 춤의 하나인 탱고는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가 춤을 신청한다. 승낙이 떨어지면(맘을 확인하면), 상체를 밀착한 채 하체를 일정하게 떨어뜨려놓고 관능적인 걷기를 시작한다. ‘정중동’의 강약으로 아름다움을 수놓으며 3분 만에 섹스의 은유를 완성한다. 주말마다 밀롱가를 찾던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탱고가 어쭙잖은 섹스보다 훨씬 낫다니까.”
이성욱 씨네21북스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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