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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전까지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었다. 신의 가르침대로, 선을 행하며 살아가는 존재인데 만약 악을 행한다면 그는 악령에 씐 자라고 여겨졌다. 그러다보니 이들에 대한 형벌이 가혹했다. 때론 산 채로 뇌를 열어 그 안에서 악마의 흔적을 찾으려고도 했다. 근대 이후 인간의 ‘이성’이 중시되자 범죄는 인간의 ‘선택’으로 이해됐다.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존재인 인간은 자신의 이익이나 쾌락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이기심에 의한 ‘악’으로 인해 사회가 혼란에 빠진 끝에 결국 해체돼버리지 않도록 ‘형벌’이 범죄를 막는 ‘심리적 억제장치’ 노릇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살인의 대가 7년, 10억이면 교도소 1년그런데 인간 중심의 근대는 중세처럼 가혹하고 자의적인 형벌을 인정하지 않았다. 범죄의 크기에 비례한 ‘적절한 형벌’이란 원칙을 반드시 준수해야 했다. 그렇다면 각 범죄의 종류와 유형에 맞는 ‘적절한 형벌’은 어떻게 정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범죄로 인해 발생한 피해의 크기에 비례’한 형벌이 답이라고 정했다. 1만원을 훔친 절도범은 1천원을 훔친 절도범보다 10배의 형벌을 주는 식이다.
그럼 강도와 성폭행, 거액 사기 범죄 등 종류가 다른 범죄 간 형벌의 차이는 어떻게 정해야 할까?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은 조금 다른 접근을 시도했다. 즉 인간이 추구하는 ‘쾌락’의 크기를 계산해 비교할 수 있고, 각 범죄행위를 통해 얻으려는 쾌락의 크기보다 약간 큰 정도의 불이익을 형벌로 정하면 된다는 이론이었다. 그럼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이기적인 인간이 ‘범죄로부터 얻을 수 있는 쾌락의 크기’와 그 대가로 치러야 할 ‘불이익의 크기’를 비교해 ‘손해가 나는’ 범죄를 포기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였다. 하지만 벤담이 세상에 내놓겠다고 호언장담했던 ‘각 범죄 유형과 종류에 수반되는 쾌락의 크기 조견표’는 2013년 2월까지도 나오지 않고 있다.
한 가족의 전 재산을 빼앗아 결국 굶어 죽게 만든 범죄와, 순간적인 분노를 참지 못해 저지른 우발적 살인 사이에 어떤 범죄행위에 수반된 쾌락의 크기가 더 클까?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형법의 범죄별 형량은 사실 ‘전혀 과학적 근거가 없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그냥 대충 상식에 기반해 정한 것이다. 범죄와 형벌 사이에 정확한 1:1 대응을 한 게 아니라, 범죄에 대해 개략적 설명을 하고 그에 따라 형벌의 상한선과 하한선을 정해두는 방식이다. 그러고 나선 ‘자유심증주의’라는 이름의 원칙하에 사건의 구체적 내용을 파악한 뒤 ‘판사가 알아서 형량을 정하도록’ 해두고 있다. 그러다보니 참혹한 아동 성폭행 범죄를 저지른 조두순이 고작 징역 8년형을 받는 등 시민 다수의 ‘상식’과 다른 형량이 내려져 재판부에 대한 사회적 분노가 표출되기도 한다.
영화 의 주인공들은 죄다 ‘나쁜 놈들’이다. 마치 ‘누가 누가 더 나쁜가?’를 가리는 오디션장 같다. 그 와중에 특히 흥미를 끄는 대사가 있다. 분노에 가득 차 자신의 여자친구의 사생활을 엿본 변태 스토커에게 살의를 품는 주인공 한현수에게 친구가 던진 말이다. “형법 제250조 살인. 사형, 무기, 혹은 5년 이상의 징역. 초범이니까 한 7년 정도 받을 거야.” 미치도록 미운 놈을 죽여 없애버리고 싶은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가로 징역 7년.
피해자 없는 범죄에 분노하는 남자친구2013년 1월, 흥사단이 전국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인식조사에서 조사 대상자의 44%가 “10억원을 준다면 교도소에 1년 정도 다녀올 수 있다”고 응답했다는 소식과 연결된다. 여기에 또 하나의 변수가 있다. ‘그 벌을 받지 않을 가능성’, 즉 증거인멸이나 알리바이 조작 등으로 ‘체포를 피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더해진다면…. 그러면 형량을 대폭 높이고 경찰력을 증강해 검거될 가능성과 형벌의 크기를 크게 높이면 어떨까? 극중 박명록이 답을 제시한다. “인간은 ‘화내는 기계’야.” 눈에 보이는 게 없다, 꼭지가 돈다, 홧김에…. 살인이나 폭력 등 강력범죄를 저지르는 사람 중 다수가 잡힐 가능성이나 형벌의 크기를 계산할 겨를도 없이 분노가 폭발해 ‘저질러버리고’ 마는 상황을 설명해주는 표현이다.
이웃집 여자의 집안에 몰래카메라와 녹음기를 설치하고 감상하는 변태 스토커는 ‘아무에게도 피해를 끼치지 않았어’라고 외친다. 하지만 그 여성의 남자친구는 그를 살해할 계획을 세울 정도로 분노한다. 사채업자는 자
신에게 거액의 빚을 진 룸살롱 여종업원이 사망해 돈을 못 받게 된 것에 분노해 마구 폭력을 휘두르고, 변태 스토커는 사채업자가 자신이 아끼는 몰래카메라 녹화 영상이 담긴 CD와 하드디스크를 가져간 것에 크게 분노한다. 대학교수 부인은 남편의 불륜에 분노해 그가 살인 누명을 쓰도록 하려고 다친 사람을 살해한다. 교수는 이혼하며 재산을 다 뺏은 부인에게 분노해 연인을 살해한 범인의 협조를 구한다.
사법 현실에서 보면 죄가 밝혀진 살인범 한현수가 가장 큰 죄인이고 그에 대한 교수의 분노가 가장 정당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보다 더 복잡하고 혼돈된 윤리의 세계에서 사는 관객은 과연 누구의 죄가 가장 크고, 누구의 분노가 가장 윤리적이라고 판단할 것인가.
표창원 범죄심리학자죄와 벌 이전에 죄책감과 반성이라는 성찰 필요해
떠도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네 가지 계급으로 분류된단다. 돈 많은 남자, 돈 많은 여자, 돈 없는 남자, 돈 없는 여자. 이들이 만들어낸 먹이사슬이 이 세상이라고 했다. 그런데 나를 이 분류 중 어디에 편입시키는가의 권리는 누가 가진 걸까? 이 질문에서부터 윤리학의 공통된 지평은 흔들린다.
영화 은 돈 없는 여자의 삶과 죽음을 둘러싼 돈 없는 남자, 돈 많은 남자, 돈 있는 여자의 난잡함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에서는 먹이사슬의 맨 위에 돈 많은 여자가 있다. 돈 없는 여자는 수컷 포식자들의 가장 만만한 먹잇감이다. 남자들은 한결같이 그녀를 착취하고 학대하고 죽인다. 그 여자가 영화에서 죽임을 당하는 진아든 영화배우로 살다가 실제로 ‘타살’당한 장자연이든 상관없다. 돈 없는 여자는 항상 밑바닥이다. 가장 분노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지만, 현실은 물론 영화에서조차 비존재로 스러진다. 그러니 아무도 그 여자를 애도하라고 채근할 리 없다.
아무도 애도하지 않는 여자의 죽음그런데, 돈 없는 여자의 욕망은 돈 많은 여자가 되는 것이다. 그 욕망이 실현되면 돈 많은 여자는 남자들의 먹이사슬 위에 서서 똑바로 살라고 냉소한다. 분노를 얘기하기 전에 인간의 윤리에 대한 의구심을 자극한다. 영화는 그런 여자들의 욕망을 그림자로 보여주는 것 같다.
이보다 더한 부조리극이 쉽게 벌어지는 곳은 현실, 그것도 주로 학교이기 쉽다. 중학교 때, 친구놈이 복도에 휴지를 버리다가 마침 지나가던 선생님에게 걸렸다. 선생님이 혼을 내자, 그놈이 항변했다. 딴 놈들도 다 버리는데 왜 나만 잡느냐고. 순간 선생님의 표정이 곤혹스러워졌다. 그놈의 논리가 어딘가 기분이 나쁘지만 그렇다고 논리의 허점을 딱 꼬집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선생님은 그놈이 얄미웠을 테다. 그런데 어쩐지 그놈을 겁내는 듯도 했다. 인간은 뻗대는 놈, 목소리 큰 놈, 때리는 놈, 돈 있는 놈, 이런 놈들에게 쫄게 되는가보다.
이번에는 내가 중학교 교사 생활을 할 때 얘기다. 교과서 채택비를 받거나 학생들에게 보충수업비를 걷는 것은 부당하다고, 교사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교무회의 때마다 사사건건 불쑥불쑥 일어나 따졌다. 하루는 나이 좀 든 교사가 조용히 불렀다. 젊은 패기로 그러는 것 다 이해하고 자기도 젊을 때는 그랬는데 세상은 그렇게 살면 안 된단다. 결국 너도 언젠가는 촌지도 받고, 채택비도 받고 그렇게 될 거다. 윤리학의 완성을 위해서, 알고 봤더니 그 교사는 초임 때부터 돈 밝히는 놈이었다는 후일담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중학교 때 친구놈은 똑같이 죄지은 놈들끼리 욕할 수 없다는 논리다. 동료 교사였던 그 남자는 우리 빨리 같이 때 묻혀서 백로와 까마귀의 구분을 없애자고 했다. 그러니 그들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아마도, 전혀 죄짓지 않는 자가 있다면 바로 그놈을 돌로 쳐죽이자, 정도가 아니었을까?
분노할 대상에 빌붙는 우리들영화를 보면 여전히 남는 의문이 있다. 첫째, 감독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돈이 있든 없든 죄를 지은 4명의 등장인물은 더 큰 권력의 눈으로 보면 그냥 일반인이다. 그래서 우리부터 반성해야 한다는 말인가? 정치인, 법조인, 재벌, 언론들은 놔두고 왜 우리만 잡아? 아, 이렇게 되는 순간 윤리의 덫에 걸려버린다. 나보다 더 많이 죄지은 놈들 탓하냐는 억울한 마음을 가지면 누구도 욕하기 애매해진다. 둘째, 영화 말미에서 여대생을 살해한 현수는 “저는 교수님 사모님일 수도 있고 여대생 덕일 수도 있고, 암튼 그분 덕에 새 생명을 얻게 되었노라”고 한다. 얼핏 살해당한 여자의 대리복수극처럼 읽히지만 현실에서처럼 돈 많은 여자는 권력자로, 돈 없는 여자는 피해자로 남았다. 진짜 살인자와 공범자들의 말로가 바뀐 것도 아이러니다. 결국 세상에는 윤리가 없다, 이렇게 되는 것 같다.
이 말은 해야겠다. 법의 주인은 누구일까? 죄를 짓는 자들이다. 좀더 정확히 얘기하면 죄를 짓고도 벌을 받지 않는 자들이다. 법이 내 소유물이라면 그 소유물이 나를 구속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법은 죄를 짓고도 벌을 받지 않는 자들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를 짓고도 벌을 받지 않는 자가 되려고 기를 쓴다. 더 슬픈 건, 대부분의 우리는 정작 분노해야 할 그 대상에게 빌붙으려 한다는 것이다. 결국 분노할 대상도 없고, 분노할 명분도 없이 세상은 굴러간다.
하지만 세상이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 대부분은 분명히 안다. 그리고 원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진정한 ‘분노의 윤리학’을 고민하게 한다. 그 고민은 죄와 벌이라는 법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죄책감과 반성이라는 성찰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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