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폐해를 다룬 TV 다큐 예고편을 보던 아이가 물었다. “자본주의가 뭐야?” 저녁을 먹던 중이었는데, 먹던 밥이 목에 딱 걸렸다. 남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일곱 살 아이에게 자본주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평소 육아 원칙이라고 가지고 있는 게 딱 하나, 무슨 질문이든 대답해주기였기 때문에 남편의 도움을 받아 대답을 하기는 했다. 그러다 보니 자본주의의 폐해 복지제도의 필요성까지 설명하게 되었는데, 심각한 표정으로 듣던 아이가 묻는다. “우리나라는 어떤 나라야?” 복지제도가 잘되어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묻는데, 그 질문에는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 글쎄, 우리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10년 전에 다니던 회사는 서울 청담동 한가운데 있었다. 기업의 VIP 고객들을 대상으로 잡지를 발행하는 곳이었다. 상위 1%의 삶을 추구하는 대략 상위 10%의 사람들에게 각종 소비문화를 안내하는 것이 콘텐츠의 대부분이었다. 그 콘텐츠의 한 페이지에 도움이 필요한 이들 혹은 단체의 사연을 실었다. 먹고살 만한 사람들의 기부를 이끌어내자는 의도였다.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표방한 것이었다.
언젠가 한 해의 마지막 호를 만들며 특집을 구성했다. 이제까지 우리가 소개했던 단체와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이 있었는지를 역으로 취재해 기사화하는 안이었다. 해당 기사를 맡았던 프리랜서 기자가 일주일쯤 뒤에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전화했다. 부끄러워서 못 쓰겠다고 했다. 한 달에 한 곳이니 1년이면 열두 곳, 그 전부터 진행했던 기획이라 스물 가까운 곳 중 도움을 받은 곳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전화가 걸려온 곳은 있는데, 전화 내용이란 게 그런 사업을 하면 돈은 좀 되느냐 묻는 것이었다고 했다. 자선이 누군가에게는 사업 아이템이 될 수 있다니 참 고약한 세상이다 생각했다.
자선을 사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복지 공약이 주요 쟁점인 TV토론을 보고 있으면 자꾸 그때 일이 떠오른다. 비정규직을 줄이고, 가계부채를 해소하고, 육아 부담을 덜어주고,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약속은 주요 대선주자들의 공통된 약속이다. 자선을 사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복지 공약도 혹시 대통령으로서의 책임 서약이 아니라 대통령이 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자꾸 의심스럽다. 똑같이 서민을 위하겠다고 말하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그들이 말하는 서민은 모두 다른 존재들이다. 그러하니 같은 약속을 하면서도 서로 상대방이 틀렸다고 비난하는 것이리라. 나는 그들 중 누구의 서민에 속할까 생각해보면 이곳도 저곳도 마땅히 낄 데가 없다.
현재 대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까지 나는 내가 뽑은 대통령을 만난 적이 없다. 그렇지만 투표를 마다한 적도 없다. 내가 낄 데 없는 사회에서 내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권리가 당장은 그 한 장의 투표용지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한 장이 어떤 형태로든 내 존재를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닥치고 투표’라는 말이 그래서 싫다. 투표는 입을 닥치는 행위가 아니라 입을 여는 행위라고 믿기 때문이다. 대선에 가려지기는 했지만 서울시 교육감 선거도 같은 날 있다. 내년이면 학부모가 되는 나에게는 대선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글이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건 어쩌면 투표일이거나 혹은 그 이후일지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선거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글을 쓰는 지금은 한 치를 예상할 수 없다. 불투명한 미래 앞에서 회의도 찾아온다. 내가 지지하던 후보가 되었다고 세상이 아름다워질까. 내가 반대하는 후보가 되었다고 해서 세상이 혹독해질까. 어느 쪽도 극단의 상상이겠지만, 내 나라는 어느 쪽이냐 묻는 아이에게 내 나라는 부끄럽지 않은 나라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나라를 만들려고 부단히 노력한다고 말하는 사람의 당선 소감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소감을 기대하며 올해도 투표하러 간다. 그 작은 한 장이 지금 내가 행사할 수 있는 최대의 권리다.
한지혜 소설가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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