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해, 여론을 살피는 일을 하다 보니 총선 직전부터 최근까지 정책 검증 좌담회 등을 통해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10대 청소년부터 70대 어르신까지, 어눌하고 투박한 목소리지만 대선에 대한 생생한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한국 사회가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는 신음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고 적신호가 켜진 지 한참 되었지만 기성 정치는 도무지 희망을 주지 못한다. 거대한 변화 앞에서 여의도의 이름 있는 정치전문가들의 분석이나 전망도 계속 빗나갔다. 기존 문법으로는 도저한 변화의 물줄기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 변화의 원천과 에너지는 시민이다. 정치가 해답을 주지 못할 때 돌파구는 ‘브나로드’, 즉 민중(시민)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것이다.
가슴이 아렸던 ‘귤 3천원어치’
좌담회에서 만난 이들은 평소 자신의 목소리를 내본 적도, 또 세련되게 낼 줄도 몰랐던 이들이 다수였다. 나이와 현재 처한 삶의 조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2012년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대다수 시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불안’을 토로했고 변화를 열망했다. 이 중에서도 20대가 느끼는 불안, 미래에 대한 암담함은 거의 절망에 가까웠다. 늘상 접해서 별로 새로울 게 없는 여론조사 수치는 현실의 피상적인 일면만을 보여줄 뿐이었다.
좌담회에서 만난 대학교 졸업반 여대생은 지방 대도시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다가 서울의 명문 사립대에 들어왔다. 벌써 여러 해째 인턴을 통해 이른바 다양한 ‘스펙’을 쌓고 있지만 회사에 지원하는 족족 미끄러지고 있다고, 하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을 생각하면 이른 시일 내에 ‘보통’의 월급을 주는 직장을 찾아야 한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현재는 인턴 수입으로 월 80만원, 월세 35만원의 고시원에서 빠듯하게 한 달을 견디고 있다. 얼마 되지 않은 좌담회 사례비로 “오늘은 귤이라도 3천원어치 사가지고 들어가야지”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가슴이 아려왔다. 애써 명문 사립대에 들어가도 고달픈 환경 때문에 미래를 차분히 준비할 수 없다 보니 친구들과의 격차는 점점 커져만 갔다. ‘비룡그룹’, 즉 개천에서 나는 용과 같이 어려운 환경에서 열심히 공부해 명문대에 진학해 성공한다는 말은 먼 과거의 이야기였다.
20대의 80%가 대학에 진학하는 상황에서, 지방이나 수도권 외곽에 소재하는 대학 출신일수록, 그리고 2년제 대학 출신일수록 상황은 훨씬 심각했다. 4년제 대학을 막 졸업한 20대 중반의 남성은 평일에는 월 60만원 급여의 인턴으로, 주말에는 복지관에서 아이들 돌보는 일을 하며 한 달에 80만원 남짓을 벌고 있었다. 결혼은 물론 연애도 엄두가 나지 않는 그는 말 그대로 ‘삼포세대’, 즉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세대였다. 앞으로도 정규직을 갖지 못할 것 같다는 그의 자신감 없는 어깨와 불안한 눈빛 앞에서, 청춘은 원래 아프다, 꿈을 위해 희망을 잃지 말고 도전하고 투자하라는 이야기는 사치에 가까웠다. 해외 자원봉사 등 다양한 경험조차 스펙이 되는 사회에서 그 경험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이들의 몫일 뿐이다.
소박한 꿈에 응답하는 정치
이런 상황을 목도하며 지금이야말로 혁명과 같은 변화가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현재는 불안에 의해 잠식당하고 미래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이 깜깜한 시대, 미래의 희망도 태생적 조건에 따라 속박당하는 사회야말로 변화가 필요한 사회가 아닌가? 하지만 대선이 다가올수록 변화의 가능성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야당은 여전히 대안의 자격이 없고, 여당은 점점 더 그들만의 기득권 세계로 안주하고 있다.
이 땅의 20대 청춘들이 큰 것을 바라는 게 아니다. 그냥 존엄하게 일할 수 있는 권리, 노동한 만큼 정당하게 보상받고 노동을 통해 좀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일자리, 비정규직이 이류로 낙인되지 않는 사회를 바랄 뿐이다. 이러한 소박한 꿈을 지닌 청춘들에게 정치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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