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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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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성’ 없는 소울 시티

파리에서 한 달간 미녀랑 데이트하면서도 손 한 번 잡지 않은 일이 준 교훈
등록 2012-09-08 11:34 수정 2020-05-03 04:26
2006년 프랑스 파리, 음소거된 TV를 보듯 외로이 독일월드컵 결승전을 보았다. 지쳐 있던 그때 S와의 데이트도, 평소와 다르게 ‘특별’했다. 
 한겨레 남종영

2006년 프랑스 파리, 음소거된 TV를 보듯 외로이 독일월드컵 결승전을 보았다. 지쳐 있던 그때 S와의 데이트도, 평소와 다르게 ‘특별’했다. 한겨레 남종영

쥐바기 행태 5년에 쥐마저 싫어진 나날이지만, 쥐 때문에 특별해진 도시가 프랑스 파리다. 2006년 독일월드컵 결승을 파리에서 혼자 봤다. 퐁피두센터 부근의 음식점들은 대형 TV 앞에 모여 프랑스의 결승전을 지켜보는 프랑스인들의 흥분으로 들썩였다.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손에 호프잔을 들고 열광하는 서울의 호프집 풍경과 아주 흡사했다. 하지만 그날 난 음식점 끝자락에서 소리를 제거한 TV를 지켜보는 느낌으로 파리지앵들과 결승전을 지켜봤다. 내 마음이 그만큼 고요했고, 지쳐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상태였기에 S와 연애를 시작하지 못했던가.

S라 함은 2006년 여름 한 달을 안식월로 파리에서 보낼 때 알게 된 유학생이다. S는 파리에 도착한 첫날밤, 라이브 재즈카페에서 알게 된 후배 친구의 선배였다. 유학 온 미술학도인 후배 친구나 그 선배인 S나 모두 초면이었다. S의 첫인상은 싸가지는 조금 없어 보이나 매우 미인이었기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공부 중인데 여름방학을 맞아 한 달간 파리에서 지낸다고 했다. 적적할 때 재즈카페에서 만나 재즈나 듣자고 했다.

이틀쯤 뒤 S에게 전화를 했더니 몹시 다급한 목소리로 와달라고 했다. 빌린 집에서 쥐가 나왔다며 너무 끔찍하다 했다. 다행히 지인이 와서 쥐덫을 놔주고 갔는데 쥐가 잡히면 어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어째 쇼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마다할 이유가 없어 두 번째 만난 미녀의 집에 들어가게 됐다. 하얀 끈끈이로 덮여 있는 쥐덫은 파리답게 예뻤다. 재즈 전문 방송을 들으며 둘이 고즈넉하게 앉아 쥐덫을 하염없이 바라보는데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이렇게 사람이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으면 쥐들이 쥐덫에 들어가긴 어렵지 않을까요?”

하여 오후의 카페를 두 번 다녀오고, 저녁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밤 10시가 넘어갈 때까지도 쥐덫은 하얗게 비어 있었다. “괜찮으시면 자고 가세요.” 온도가 40℃를 오르락내리락하던 때라 그녀의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나오는 참에 조르르 기어나온 생쥐를 발견했다. 얼떨결에 슬리퍼로 녀석을 후려쳐 잡았다. 그리고 난 의기양양하게 이제 안심하라 하고, 거실에서 그림 작업을 하던 그녀를 놔두고 혼자 침실에서 잤다. 다음날 아침, 두 번째 만나 밤을 보낸 그녀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상큼하게 헤어졌다.

그리고 간간이 S를 만나 재즈카페를 찾아다녔고, 돼지고기를 넣은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 하여 내가 빌린 집으로 초대해 와인과 함께 저녁을 먹기도 했다. 서로 호감을 느끼는 게 보이는데도 신기하게 손 한 번 잡지 않았다. 선수가 아니라도 이건 예의가 아니지 싶다가도, 그냥 이 상태가 좋지 않으냐고 혼자 주접 떠는 사이에 시간은 마냥 흘러 파리에서 체류하는 마지막 날이 되었다. 그날 마지막 데이트를 역시나 건전하게 마치고 아무런 스킨십 없이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난 다른 여자와 연애를 했고, S는 근사한 파리 아티스트 청년과 결혼했다.

2년 전 서울을 방문한 S부부와 저녁을 먹었고, 올해 초 혼자 내한한 S와 저녁을 먹었다. 그날 S는 여전히 싱글인 나를 위해 미대 동창생을 초대해주었고, 나는 그분과 사랑을 시작했다. 올봄에는 S부부가 사는 파리 근교 집에 놀러갔다. 이 인연은 내게 많은 교훈을 남겨주었는데, 덤으로 파리를 (육체성 없는) 소울 시티로 만들어주었다.

이성욱 한겨레출판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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