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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백작’ 아니라 ‘명동 아가씨’

등록 2012-08-15 16:37 수정 2020-05-03 04:26

서울 명동에는 ‘이상의 거리’가 있다. 시인 이상이 운영했던 다방 ‘무기’가 있던 자리다. 명동은 한국전쟁 이후 피폐해진 한국의 문학과 예술을 보듬고 잉태시키던 보금자리였다. ‘명동 백작’으로 불린 소설가 이봉구는 술집 ‘은성’에서 흐트러짐 없이 술을 마셨고, 시인 박인환은 ‘명동 샹송’이라고 불린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세월이 가면’)를 읊었다. 지난 2~3월 서울역사박물관의 ‘서울 반세기 종합전-명동 이야기’나 지난해 서울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임응식 사진전’ 등은 이런 명동의 문화예술적 공간성에 주목해 기록으로 남기려는 시도였다.
 
소비 행위가 가져다준 새로운 정체성 
 그러나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함께했다 할지라도 누구의 경험을 중심으로 해석되고 쓰이느냐에 따라 그 공간의 역사는 달라진다”. 여성학 연구자 김미선씨의 (마음산책 펴냄)는 명동의 ‘주체’를 여성으로 삼았다. ‘명동 백작’이 아니라 ‘명동 아가씨’의 시선으로 명동의 공간성을 들여다본 것이다. 그에 따르면 명동은 여성의 일상적인 삶의 터전이자 해방구였다.
 명동은 조선시대 권세 없는 양반들이 살던 곳이었다. 식민지 시기 일본인들의 거류지가 조성돼 미쓰코시백화점(현재 신세계백화점) 등 4개의 백화점, 양품점과 미장원 등이 들어선 대형 상업지역이 됐다. 본정과 명치정으로 분리된 지역이 ‘명동’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인식된 것은 1950~60년대 재건사업이 이뤄지면서다. 명동은 “산불 끝에 돋아나는 고사리순같이”(1953년 4월19일 ) 예전 모습을 빠르게 되찾았고, “한국의 유행은 서울에서 퍼지고, 서울의 유행은 명동에서 시작”(1957년 11월25일 )됐다.

명동은 여성의 일상적인 삶의 터전이자 해방구였다. 임응식의 사진 <여인들>. 마음산책 제공

명동은 여성의 일상적인 삶의 터전이자 해방구였다. 임응식의 사진 <여인들>. 마음산책 제공

 

이런 명동은 여성의 소비의 공간이었다. 한양장점을 시작으로 국제양장사·송옥양장점 등 수십 개의 양장점, 허바허바미장원·백난미장원 등 미용실뿐 아니라, 양재·미용 기술을 교육하는 학원들까지 대거 들어섰다. 목욕·수도 시설을 갖춘 집이 흔치 않던 시절이라 여성들은 오늘날보다 미용실을 자주 이용했다. 1968년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80%가 적어도 2주에 한 번씩 미용실을 이용했다. 소비라는 행위를 통해 여성들은 새로운 문화를 체험하고, 이전과 다른 정체성을 형성했다. 1930년생 안경숙(당시 무역회사 경리부 직원)씨는 “내 형편에 최선을 다해 멋도 부려보고 싶고, 그러면서 내가 생각하고 노력하면 된다 하는 자신감도 얻었다”고 말한다.

 명동은 또한 여성 노동의 공간이기도 했다. 생계를 위해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1962년 를 보면, 취업여성은 겨우 9%에 불과했다. 그나마 식모가 가장 많았고, 다음이 밀창(성매매)이었다. 양재와 미용이 인기 직업으로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여성의 노동력을 가정에 묶어둘 수 없는 곤궁한 나라 형편에서 이 분야는 여성성과 밀접하게 관련되면서도 여성 고객을 대상으로 한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명동아가씨> 책 표지.

<명동아가씨> 책 표지.

먹고살기도 어려운데 ‘외모 관리’에 힘쓰는 여성의 소비문화를 너무 긍정적으로 본 것은 아닐까? 또한 저자는 “다양한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조건에 처한 여성들이 공존하면서 새로운 도시 문화를 만들었다”고 강조하지만, 지위와 조건의 차이를 부각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대적 조건을 고려할 때, 그리고 이 책이 단순한 소비 주체나 남성 시선의 대상으로 취급된 여성들의 존재감을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 점을 고려하면, 이런 지적은 부질없어 보인다. 저자는 “외국에서 경제 원조를 받고 있고, 남북통일이라는 과업이 놓여 있는데 외제 화장품을 쓰고 옷을 해 입는다”며 여성의 소비를 사치와 허영이라고 타박하는 것은 식민지 시기 신여성에게 가해진 비난과 같은 맥락이라고 반박한다. 그러면서 “한국전쟁 이후 명동이 한국 사회, 특히 소비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오는 과정에서 여성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명동의 공간성을 재구성해 여성이 단순한 수혜자가 아니라 그 과정에 적극 참여한 존재임에 주목했다”고 말한다.

 

생생한 인터뷰가 불어넣는 생기 

 풍부하게 인용된 등 당시 여성지와 여러 일간지 기사, 이제는 할머니가 된 당시 ‘명동 아가씨’들의 생생한 구술 인터뷰는 책에 생기를 준다. “‘박씨’하고도 긴 듯한 쟈켙을 가진 투피스 스타일이 오바코트를 입은 것보다 한층 경쾌하고 씩씩해 보인다” “지나칠 정도의 노출도 자기의 체격을 봐서 해야 할 텐데, 이 옷의 노출은 체격의 결점을 만천하게 공개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등 ‘명동 아가씨’들의 옷차림에 대한 사진과 품평은 요즘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명동의 주요 고객이던 엄앵란 등 여성 배우·가수들의 옛 모습과 패션 화보, 미스코리아 대회, 최초의 미국 유학파 디자이너인 노라노의 패션쇼, 1950~60년대 명동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담은 흑백 사진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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