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년 2월30일, 고종은 외교통상 사무를 맡은 통리아문에 박문국·제중원·전환국·기기국이 각각 언제 창설됐는지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통리아문은 박문국은 1883년 7월15일, 제중원은 1885년 3월7일 창설됐으며 모두 통리아문 관할이나 전환국과 기기국은 다른 부서 관할이라고 보고했다. 고종이 물어본 네 기관은 모두 조선 정부가 외국인을 ‘고빙’(雇聘)해 설립한 국가기관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제중원의 호러스 앨런은 조선에 서양 근대의학을 처음 도입한 ‘한국 의학의 아버지’처럼 추앙받고 있으나 박문국의 외국인이 누구였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브란스병원과 서울대병원은 서로 자기들이 제중원의 ‘정통 계승자’라 주장하고 있으나 박문국을 계승했다고 자처하는 기관은 없다. 박문국에서 발간한 를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신문의 날은 창간호가 발행된 4월7일이다.
23살 편집국장, 25살 병원장
1882년 수신사로 일본에 간 박영효는 일본 재야의 거물이자 문명개화론의 선구자인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났다. 그는 후쿠자와에게 조선 개화의 방도를 물었다. 그 자신 신문 발행인이던 후쿠자와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신문을 발행해 인민을 계몽하는 것이라 답했다. 박영효는 그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후쿠자와는 제자인 이노우에 가쿠고로 등 몇 명을 추천했다. 귀국 뒤 고종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박영효는 그해 겨울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에게 이노우에 등 7명을 고용하겠다고 통지했다. 이듬해 봄 이노우에 가쿠고로, 우시바 다쿠조, 다카하시 세이신(高橋正信) 등이 입국했다. 이들이 서울에 상주한 최초의 일본 민간인이었다.
조선 정부는 통리아문 산하에 박문국을 설립하고, 사무소와 인쇄소를 한성부 남서 저동의 관용 건물에 두었다. 현재의 을지로2가 168번지 신영증권과 동양종합금융 자리다. 애초에는 한성부 판윤 박영효 책임하에 한성부에서 발행할 계획이었으나 박영효가 광주유수로 좌천돼 신문 발행은 통리아문 소관이 되었다. 이때 이노우에의 나이는 겨우 23살이었다. 하기야 그의 상관 박영효는 그보다 1살이 어렸고, 이듬해 입국해 제중원 의사가 된 앨런도 그보다 겨우 2살이 많았다. 이들은 요즈음이라면 평화봉사단원도 못 될 나이에, 한 나라의 신문 발행 사무와 국립 의료기관을 담당한 것이다.
그런데 이 무렵 서울에 들어온 서양 청년들은 모두 내심 바짝 겁을 먹고 있었다. 그들은 1866년의 병인박해에 관한 소문을 알고 있었고, 죽을 수도 있다는 각오로 들어왔다. 현재의 한국 기독교는 그들의 그런 각오를 높이 평가한다. 비록 그들 중에 죽은 사람은커녕 매 한 대 맞은 사람도 없었지만. 이노우에 등의 두려움은 그들보다 더했을 것이다. 조선 정부의 허락 없이 몰래 들어와 포교하던 프랑스 선교사가 죽임을 당한 것은 20년쯤 전이었지만, 조선 정부의 공식 초청으로 들어온 호리모토 레이조가 맞아 죽은 것은 바로 그 전해였다. 어쩌면 그에게는 ‘조국’ 일본이나 스승 후쿠자와가 서양 선교사들의 하나님 같은 존재였을 수도 있다.
일본인 편집국장, 청나라 비판에 나서다
‘조선 개국 492년 계미 10월 초1일’, 제1호가 발행되었다. 임오군란 이후 청군이 조선을 점령한 상황에서, 청나라 연호 광서(光緖) 대신 조선 개국 연호를 쓰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경복궁 광화문 바로 뒷문은 흥례문(興禮門)인데, 원래는 홍례문(弘禮門)이었다. 홍(弘)자가 청 건륭제 홍력(弘曆)에 기휘(忌諱)된다는 이유로 부득이 흥례문으로 바꾼 것이다. 심지어 김홍집(金弘集)은 이름마저 김굉집(金宏集)으로 바꿔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광서 연호를 묵살하고 개국 연호를 쓰는 결정을 박문국 독자 판단으로 했다고 볼 수는 없다. 아마 권력 핵심에까지 이르는 사전 조율이 있었을 것이다. 이노우에가 이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열국에까지 반포”하는 신문에는 ‘독립 연호’를 쓰는 것이 국제 통례라는 사실을 알렸을 가능성은 있다.
의 기사 작성은 주사 김인식과 사사 장박·오용묵·김기준 등이 담당했고, 이노우에는 편집을 맡았다. 오늘날의 편집국장이었던 셈이다. 한 일이야 달랐지만 조선 정부 내의 위상으로 보면 제중원의 앨런과 같았다. 그런데 ‘독립 연호’를 쓴 것과 같은 취지에서, 기자와 편집자들은 청나라의 조선 ‘속방화’ 정책에 비판적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청나라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기사의 내용이나 편집 방향이 ‘편향적’이었다.
1884년 1월 에 ‘화병범죄’(華兵犯罪)라는 제하에 청병이 강도짓을 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를 본 북양대신 이홍장은 총판조선상무 진수당에게 진상을 조사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진수당은 다시 통리아문 총판 김병시에게 경위를 물었다. 김병시는 확인해본 결과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확증 없이 기사화한 것이라고 통지했다. 격노한 이홍장은 “일국의 관보가 떠도는 소문 따위나 수록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항의했다. 이에 근대 신문 발행 이래 최초의 오보 사건이자 필화 사건이 일어났다. 이노우에는 사직했고, 관련자들은 처벌받았다. 그런데 이 기사가 정말 오보였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진수당은 “조선인이 청병으로 변장하고 저지른 범죄”였다며 현상금을 내걸고 진범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이노우에는 1886년 가 로 이름을 바꿔 복간될 때 다시 입국했다. 일본에 있는 동안 그는 의 문제점에 대해 후쿠자와와 여러 차례 토론했던 듯하다. 그는 신문이 문명개화의 수단이 되려면 독자층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 독자층은 ‘상인’(商人)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강위와 함께 ‘연구’해 에 일본식 한문 표기법과 유사한 ‘국한문혼용체’를 적용했다. 복잡한 존비법 대신 일본식 존대어와 평어만 남은 현대 국어는 여기에서 출발했는지 모른다.
제중원·박문국은 모두 정부기관
이 땅에 처음 생긴 서양식 병원은 1879년 부산에 문을 연 일본인의 제생의원이다. 그러나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라는 영예는 제중원이 가져갔다. 더구나 제중원은 박문국과 함께 통리아문 산하의 정부 기관이었음에도, 미국 선교의사 앨런이 설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노우에가 스스로 조선 침략의 첨병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 일로만 보자면 그와 앨런 사이에 근본적 차이는 없다. 이 둘의 근본적 차이는, 역사가 사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고빙한 것은 모두 조선 정부였다. 비슷한 일을 한 두 사람을 하나는 ‘침략의 첨병’으로, 다른 하나는 ‘민족의 은인’으로 기억하는 것은, 이들의 ‘고용주’를 무시한 때문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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