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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불명이라 더 재미있네

예능과 교양 프로그램이 교감한 다큐 시트콤 <미래소년 코드박>에서 허구를 통해 현실성을 획득하는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경향을 찾다
등록 2012-02-10 17:54 수정 2024-11-06 11:34
<문화방송> 시트콤 <미래소년 코드박>

<문화방송> 시트콤 <미래소년 코드박>


이것은 다큐멘터리인가 예능인가. ‘다큐멘터리 시트콤’을 표방한 문화방송 파일럿 프로그램 <미래소년 코드박>은 뜻밖의 수확임이 분명해 보인다. 스튜디오 토크쇼와 시트콤, 시민과 전문가의 진지하고도 생생한 인터뷰를 버무렸다. 다큐멘터리의 형식과 문법을 빌려온 기존의 ‘페이크 다큐멘터리’(모큐멘터리)와도 다르고, 그렇다고 재미만을 추구하는 몇몇 재연 프로그램과도 거리가 멀다.


나도 오피스와이프가 있음 좋겠다?

형식을 따져묻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 프로그램의 미덕은 ‘다큐 시트콤’이라는 조금은 억지스러울 수도 있는 형식이 아니라 방송을 통해 시청자와 교감하고, 소통하고, 나누고자 했던 내용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언뜻 예능 프로그램인 것처럼 보이지만, <미래소년 코드박>은 문화방송 시사교양국의 작품이다.


  <PD수첩><불만제로> 등 교양국의 간판 프로그램들을 거친김종우 PD가 연출을 맡았다. 하지만 시청자 게시판을 장식한 반응들은 “간만에 재미있는 예능 프로그램을 만났다”는 것으로 수렴된다. 시청자가 이를 ‘다큐’보다는 ‘예능’의 새로운 변주로 인식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제작진도 “예능 쪽으로 한발 다가섰다”는 평가를 부인하지 않는다.

설 연휴 기간에 특별 편성된 <미래소년 코드박>이 주목한 코드는 다름 아닌 ‘직장인의 애환’이었다. 코드박은 프


로그램의 호스트인 박수홍과 박휘순의 별칭이다. 박수홍이 연기한 첫 번째 꼭지 ‘오피스와이프’는 아내(혹은 남편)보다 이성인 직장 동료에게 기대곤 하는 이 시대 직장인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코드박 박수홍과 그의 아내이자 워킹맘 정가은은 “1시간을 하루처럼 쪼개 쓰는” 평범한 직장인 부부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고 데려오는 일조차 이들에게는 쉽지 않은 도전이다. 코드박은 직장에서 함께 근무하는 젊은 여성에게 이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설 연휴 기간에 특집 편성된 문화방송 <미래소년 코드박>은 스튜디오 토크쇼와 시트콤, 시민들과 전문가의 생생한 이야기를 결합한 독특한 형식으로 ‘직장인의 애환’을 다뤄 폭넓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예능 쪽으로 한발 다가선 시사교양국의 생존 전략이다.

설 연휴 기간에 특집 편성된 문화방송 <미래소년 코드박>은 스튜디오 토크쇼와 시트콤, 시민들과 전문가의 생생한 이야기를 결합한 독특한 형식으로 ‘직장인의 애환’을 다뤄 폭넓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예능 쪽으로 한발 다가선 시사교양국의 생존 전략이다.


혼란에 빠진다. 맞벌이라는 현실을 함께 헤쳐나가는 동지이자, 내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아내에 대한 사랑이 식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루에도 열 몇 시간씩 얼굴을 맞대고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어쩌다 보니’ 심정적으로 의지하게 됐다. 박수 쳐줄 일은 아니지만, 당신이 직접 겪을 수도 있는 일이다. 결혼정보회사 ‘가연’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나도 오피스와이프(허즈번드)가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답한 응답자는 남성의 65%, 여성의 59%에 달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미래소년 코드박>은 현실과 허구를 절묘하게 결합시킨다. 고민에 빠진 코드박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은 프로레슬러이자 칼럼니스트인 김남훈이다. 그는 코드박에게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기보다는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연간 평균 근로시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인 2193시간에 달한다”며, 죽어라 일만 할 것을 강요하는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린다. 여기에 “일하는 시간이 너무 길다” “집에서 가족과 대화하는 시간은 길어야 1시간”이라는 시민들의 인터뷰가 더해진다. 스튜디오에서는 “코드박의 처지를 이해한다”는 출연진과, “아무리 그래도 그런 행태는 아내에 대한 배신”이라는 출연진의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코드로 푸는 우리 사회의 딥(deep) 담화

‘루저 연기의 달인’이라는 칭호를 얻은 박휘순이 연기한 두 번째 꼭지는 ‘인센티브’다. 새로 부임한 사장은 적극적인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한다. 이에 따라 각 부서와 그에 속한 개인들 사이의 무한경쟁이 시작된다. 동료애도, 팀워크도 모두 헛말이 된다. 직장은 어느덧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치킨게임의 공간으로 변질된다. 박휘순은 결국 믿었던 동료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도둑맞고, 경쟁에서 밀린 끝에 직장에서까지 쫓겨난다. “그동안 고마웠다”며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그의 얼굴 뒤로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라는 새로운 사훈이 겹쳐진다. 동네 포장마차에서 쓴 소주를 들이켜는 코드박 박휘순, 그에게 다가온 사람은 다름 아닌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홍기빈 소장이다. ‘포장마차 셰프’를 연기한 홍기빈 소장은 각종 통계자료를 언급하며 “인센티브 제도는 오히려 집단적 생산성을 저하시킨다”고 지적한다. 제작진의 설명대로 “코드로 푸는 우리 사회의 딥(Deep)담화”답다. 프로그램의 실재성, 동시대성, 현실성을 획득하는 매우 독특하고도 이례적인 방식이다.

하기야 각종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이 ‘다큐멘터리 장르의 변주’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요즘이다.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존의 시도들은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를 벗어나지 못했다. 단순히 다큐멘터리의 형식만 차용했기 때문이다. 2011년 여름 방송된 같은 방송사의 가 대표적인 사례다. <노처녀가>는 허구를 다룬 모큐멘터리다. 다큐멘터리처럼 보이지만, 연출된 상황에서 전문 연기자들이 ‘노처녀 캐릭터’를 연기했다. 프로그램 도입부에 “이는 연출된 상황”이라고 밝혔지만, 이 프로그램은 방송 이후 숱한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자신이 몰입한 출연자들이 실존 인물이 아니라 배우임을 뒤늦게 깨달은 시청자는 “농락당한 기분” “최악의 반전”이라는 혹평을 쏟아냈다. 불륜 현장을 덮치는 미국의 리얼리티 프로그램 <치터스>를 모방한 tvN <독고영재의 스캔들>은 과도한 설정과 선정성 논란 속에 종영됐다. 비교적 호평을 받았던 최근의 시도들은 시청자의 시선에서 “이것은 실제가 아니다”라는 점을 분명히 전제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케이블 방송에서 인기를 끌었던 <막돼먹은 영애씨> <롤러코스터>


장르간 이종교배로 힘 얻는 다큐멘터리

물론 이런 시도가 갈수록 그 입지가 협소해지고 있는 다큐멘터리의 현실 속에서 이뤄졌다는 점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아마존의 눈물> 등 대규모 자본과 인력이 투입된 ‘블록버스터급’ 다큐멘터리가 아니면 시청률 측면에서 성공을 담보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한 공중파 방송사의 PD는 “지금 워낙 시사교양 PD들이 위축된 상황이 아니냐”라고 반문했다. 프로그램을 연출한 문화방송의 김종우 PD는 “시사적이고 사


회적인 주제를 좀더 재미있는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며 “지금 단계의 <미래소년 코드박>을 다큐멘터리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다. 앞으로 다큐적인 요소와 함량을 더 늘려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예능 쪽으로 한발 넘어간 <미래소년 코드박>은 다큐멘터리가 내놓은 생존의 방향 중 하나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자신의 임신과 출산 과정을 다룬 독립다큐멘터리 <두 개의 선> 개봉을 앞두고 있는 신지민 감독은 “요즘 방송에서는 다큐멘터리적 요소와 예능적 요소가 뒤섞이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라며 “이를 딱히 장르의

엠넷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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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범으로 바라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긍정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시청자의 호평을 받은 <미래소년 코드박>은 아직 정규 편성 여부가 결정나지 않은 파일럿 프로그램이다. 김종우 PD가 밝힌 포부는 이렇다. “앞으로는 인구에 회자되는 모든 것을 소재로 다룰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최근의 ‘노스페이스 패딩’이나 ‘로또’ ‘대박’ ‘섹시함’과 같은 코드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인 부분도 가능하다. 앞으로 꼭 다뤄보고 싶은 코드 중 하나는 ‘386’이다.” 정통 다큐멘터리로 접근한다면 오히려 진부하거나 식상할 수 있는 소재를 ‘다큐 시트콤’이라는 형식으로 다뤄 시청자와 폭넓게 공감하겠다는 전략이다.

해외에서도 서로의 미덕을 차용하고자 하는 장르 간 이종교배가 활발하게 벌어진다. 마니아들 사이에 엄청난 반향을 불렀던 시트콤 <럭키 루이>는 미국 노동자계급 가정의 이야기를 다소 센 수위로 담아낸 성인 코미디다. 섹스·마약 등의 코드와 심지어 성기 노출마저 심심치 않게 등장하지만, <럭키 루이>는 기본적으로 ‘따뜻한 드라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어린 딸을 사랑으로 키워내는 맞벌이 부부의, 다소 황당하지만 재기발랄한 에피소드가 이어진다. 첫 시즌의 성공에 힘입어 다시 제작된 <루이>는 같은 인물들이 같은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설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우선 스튜디오를 버렸고, 전편에 이어 다시 주연을 맡은 코미디언 겸 극작가 루이스 C. K는 전편의 자동차 수리공이 아닌 실제 자신의 직업인 코미디언으로 등장한다. 전편에서 주인공의 아내를 연기했던 파멜라 애들런은 이번에는 친구로 출연했다. 미국 뉴욕의 한 코미디클럽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이름으로 출연하는 스탠딩 코미디쇼는 극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스튜디오 시트콤이 다큐멘터리 쪽으로 한발 다가선 사례다. 왕년의 액션스타 실베스타 스탤론이 아마추어 복서들을 키워내는 리얼리티 프로그램 <컨텐더>는 과연 예능인가, 다큐인가, 극영화인가.

“실재성과 허구성 차이 언급 무의미”

비교적 최근의 이론적인 논의도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허무는 경향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프랑스의 기호학자이자 내러티브 이론가인 크리스티앙 메츠는 “영화는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현실에서 부재한 상상적 기표를 묘사한다”고 했다. 메츠에 따르면 모든 영화(혹은 텔레비전 영상물)는 그 대상을 비현실화·허구화한다. 이는 사실성을 철칙으로 삼는 정통 다큐멘터리 역시 부정할 수 없는 명제다. 야생의 생태계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야 하는 자연 다큐멘터리일지라도 감독(혹은 카메라맨)의 인위적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나 최근 화제를 부르고 있는 <부러진 화살> 같은 극영화들은 완전한 허구인가, 혹은 <화씨 9/11> 같은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는 클로즈업이나 배경음악의 사용 등 극영화적인 인위적 연출에서 자유로운가. 피종호 한양대 교수가 “다큐멘터리의 실재성과 허구성의 차이를 언급하는 것은 그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해석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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