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종영한 ‘무릎팍 도사’는 거나한 유작을 남기고 유종의 미(?)를 거두셨나니, 그 업적이란 바로 장근석 구호 성공이다. 무릎팍 도사님이 5년 남짓 동안 행하신 기적 중에서도 이 아름다운 청년을 수백만 안티의 수렁과 나락에서 구원하사, 울트라 하이퍼 게이지 에네르기의 원천으로 다시 나게 하심은 단연코 으뜸이라 할 만하다. 그가 무릎팍 도사에게 털어놓은 고민은 “이승기랑 친해지고 싶어요”. 이토록 진정성 있는 고민은 일찍이 없었던 듯. 이유인즉 이렇다. “남자들도 좋아하는 이승기, 나는 남자애들이 싫어하는데….”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는 쿨한 태도와 현실 개선 의지에다 남심 없이 여심만으론 더 큰 양적 팽창이 어렵다는 비즈니스적 진단까지. 고것 참으로 영민하다. 우리는 지금 한 아이돌이 거듭나는 새로운 방법을 목도하고 있는 참이다.
아역배우가 거듭나는 법
희대의 미스터리 “뉴욕 헤럴드 트리뷴~” 코드가 드디어 풀렸다. 2008년 자신의 싸이월드에 “샹젤리제 거리에서 이렇게 외칠 테다. 뉴욕 헤럴드 트리뷴!”이라는 글로 단박에 10만 안티를 양성했던 그다. 많은 사람들의 손발을 오그라들게 했던 이 문구는 영화 의 한 대목이란다. ‘무릎팍 도사’에서 장근석은 거장 장뤼크 고다르 영화를 사랑하는 배우로서 자신의 진지한 접근 태도를 전략적으로 살짝 노출시키며, 국민 조롱 대상에서 미워할 수 없는 악동으로 기막힌 한판 뒤집기를 해냈다. 방송가에서 암암리에 쓰이다 이젠 공공연해진 ‘호’와 ‘비호’의 경계는 참으로 이율배반적이면서도 오묘하다. 누구는 비호감 연예인이라는 지우지 못할 낙인을 찍히고, 어느 누군가는 한순간에 호감으로 팔자를 고친다. 장근석의 선배를 찾자면 자의식 과잉의 대명사였던 최민수, 신해철쯤을 들 수 있겠다. 장근석은 그들에 버금가는 허세 아이콘이었으되 그들보다 훨씬 빨리 가면과 꾸밈을 벗고 유쾌한 솔직함으로 재무장해 대세로 거듭났다.
선별된 정보, 통제된 이미지만을 노출시킬 수 있던 예전 연예계에 비해, 일거수일투족이 24시간 상시 노출되는 시대에 연예인의 자의식 과잉은 피할 수 없는 직업병인 듯하다. 게다가 아역배우는 대중에게 소비되며 성장기를 버텨낸다. 자신을 방어하려고 낭만적 병세를 키우는 그들을 나무라기는 어렵다. 해리 포터를 연기한 대니얼 래드클리프도 이런 괴로움을 토로한 바 있고, 에마 왓슨이 대학 졸업 때까지 연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쇼트커트 머리를 시도하는 것도 엇비슷한 고민의 연장선상에 있다. 슈퍼스타는 외롭다. 아역배우는 더더욱 외롭다. 이민호 등 또래 연예인들에게도 “친구 하자”고 문자를 보냈다는 대목에서, 장근석의 근원적 외로움을 엿볼 수 있다. (늘 기회 닿을 때마다 주장하는 바인데 연예인을 위한 심리상담 코스가 마련돼야 한다. SM을 비롯한 국내 굴지의 대형 기획사들은 커리큘럼에 이 점을 꼭 반영해주길 바란다.)
“드라마 를 찍을 때 빨리 남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운동도 하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수염도 길렀는데 지금은 그게 오류였다고 생각해요. 너무 어린 나이에 마초가 되고 싶어 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지요.”(사진작가 조선희와의 인터뷰에서) 19살 때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상처를 진짜 많이 받았는데 어느 순간 내가 이럴 때가 아니구나, 너희들 그렇게 욕하지, 내가 너희들을 다 뒤집어줄게.”()
장근석이 갖춘 강단은 한층 진화된 연예인 유형의 상징이다. ‘자살’ 혹은 ‘은둔’ 또는 ‘칩거’하지 않고 비뚤어지지도 않았다. 지금 그가 누리는 인기는 주요하게는 드라마 라는 작품 하나에서 비롯했지만, ‘아시아 프린스’로 등극한 데에는 본래 그가 지닌 기운이 기저로 작용했을 터. 그는 과연 다른 종자일까. 과거 자의식의 아이콘들이 두려움이나 로망의 대상에서 종이호랑이가 된 반면, 장근석은 희화화를 딛고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미남이시네요”장근석의 외모는 큰 자산이다. 원빈이나 장동건처럼,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뭐라 토 달 수 없는 이목구비를 지녔다. 일본의 한 잡지는 관상학자의 말을 인용해 “장근석의 인기 비결은 달콤하고 귀여운 외모에 있다”며 “커다란 눈, 부드러운 머리카락 등 여성스러운 외모에 예쁜 것을 좋아하는 일본 여성들이 캐릭터를 사랑하듯 장근석에 빠졌다”고 평했다. 게다가 “배용준의 팬이 40~50대 여성인 데 비해 장근석은 20~30대 여성에게는 예쁜 얼굴로, 40~50대 여성에게는 배용준만한 근육질로 사랑받으니 팬층이 더 넓다. ‘장근석이 배용준을 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친절하게 분석한다. 그가 일본 대중에게 다가서는 방식을 보면 한류 배우로서도 변종이다. 몇 달 전에 장근석은 일본 간판 예능 프로그램 의 ‘비스트로 스맙’ 코너에 출연했다. 이 프로그램을 다녀간 한류스타들이 말없이 웃고 다소곳했던 데 비해, 장근석은 적극적으로 주문하고 출연진에게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주며 “서울 오면 연락하라”고 당부한다. 한국의 ‘무릎팍 도사’에서 그랬듯 셔플댄스를 추며 무대를 주물렀다. 일본 시청자가 장근석을 한국 배우가 아니라 “아시아인 같지 않아서” 좋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프로그램을 다녀간 미국 배우들처럼 그는 예능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즐기고 판을 휘두르려 한다. 자의식이 넘쳐나는데 넘치는 자의식 속에 갇히지 않는 것, 그것이 장근석이 살아남아온, 아시아에서 흥하는 비결이다.
그러나 더 이상 일제 코끼리 밥통에 열광하던 시절이 아니므로 일본에서 흥했다고 금의환향, 국위선양이라며 한국 대중이 반색하진 않는다. 오히려 장나라, 안재욱, 류시원 등은 국내외의 인기 괴리라는 공통적인 딜레마에 빠져 있다. 냉정히 얘기해 데뷔 20년차라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그동안 배우 장근석은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장근석을 위한, 장근석에 의한, 장근석의- 맞춤형 캐릭터들을 맡았다. 아역의 연장선 , 성인 연기의 시작 도, 김명민에게 눌린, 아시아 투어를 있게 한 까지, 그리고 또 한 번 한-일 양국의 문을 두드릴 영화 마저도 사실 꽃남 컬렉션 일색이었다. 그의 입체성은 그가 보여온 인물들이 아닌 장근석이란 인간 자체에서 확보됐던 셈이다. 그의 존재감을 형성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극중에서 보여온 연기가 아닌, 일상에서 펼친 명연기, 바로 허세였다.
밀레니엄 시대의 놀이터인 싸이월드에는 허세가 가득하고, 386세대의 뉴미디어 블로그엔 ‘덕후’들이 난무한다는 말은 이제 정설이다. 연예인도 아닌 일반인의 사이버 자아도 곧잘 겪는 경험이다. 실제의 나와 내가 보여주고 싶은 나, 그 간극은 곧잘 다른 사람의 놀림거리가 된다. 그는 우울의 늪에 빠지는 대신 정면돌파를 택했다. “학교에 친구 하나도 없어.”(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자신의 약점을 대수롭지 않게 드러내는 데서 장근석의 시류와 타이밍의 승부사 기질이 엿보인다. 건강한 자기애야말로 흔들리지 않는 심지이고, 그는 이제 그것을 터득한 것처럼 보인다. 일이 없을 때면 폭풍 트윗을 하고 순회공연 때는 트윗을 비워두면서도 그는 이게 바로 ‘밀당’(밀고 당기기)이라고 방문자들을 웃긴다. 그 표현대로라면 그는 허세와 약점의 ‘밀당’으로 장근석의 존재감을 키워온 셈이다.
신인류 연예인 ‘근짱’훈육된 엔터테이너가 아닌 신인류 연예인, 이들이 왔다. 독보적 유영을 하고 있는 지드래곤, 장근석에 필적할 만한 자아를 지닌 유아인, 솔직한 입담 하면 빠지지 않는 ‘우주 대스타’ 김희철 등은 지금까지의 아이돌과 확연히 구분되는 문화적 코드를 지닌 이들이다. 또래 친구에 목마르다는 장근석에게 추천할 만한 친구들이다. 그중 어떤 자리든 ‘협찬 덩어리’로 등장해 ‘엔도르핀 덩어리’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장근석은 단연 독보적이다. 일본 오리콘 석권에 빛나는 앨범 활동, 자신의 이름을 단 잡지 발행, ‘장근석 어플’ 출시 등 빠르게 시장을 장악해서만은 아니다.
지난 부산국제영화제 때 부산을 찾은 장근석은 기습 트윗을 올렸다. “장근석의 노래 듣고 싶은 사람은 해운대로 컴온!!” ‘아시아의 왕자’는 해운대 바닷가를 지나는 행인에게 관람료로 1천원씩 챙기며 노래를 불렀다. 23만원을 벌었다는 자랑도 잊지 않았다. 대종상영화제에서는 김하늘이 울며 수상 소감을 말하는 동안 카메라를 향해 윙크해 보였다. “근석 오빠, 어제 대종상에서 왜 나대셨어요?” 한 팔로어의 질문에 그는 대답한다. “피가 끓더라고 ㅋㅋ” 그는 이슈메이커로서의 자신을 즐기는 천생 연예인이다. 관심을 먹고 사는 ‘꾼’이다. 놀이꾼, 입담꾼. 지금 대한민국 넷심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까고 씹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일상을 나누고 공감하고 키득키득 웃기 위해 들여다본다. 그는 범접할 수 없는 왕족의 포스나 환상 속에 존재하는 아티스트 같은 이미지를 구축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기꺼이 털어버렸다. 섹시한 외모와 털털한 성격이라는 상반된 이미지의 공존을 이루어낸 거의 유일한 사례인 이효리 케이스와 그 궤를 같이하지만, 친근함을 얻으려는 계산속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완전히 울타리에 갇혀서 살아야 하는 거지. …내가 원해서 간 거긴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었지. …언젠가는 탈출할 수 있는 노하우가 생기겠지.”( 인터뷰에서) 아이돌 자리를 즐기면서도 늘 탈출하는 꿈을 이야기하는 그의 본능이 만들어내는 놀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월드스타 비도 나의 젊음은 절대 못 이겨” 식의 현직 아시아 프린스의 자신감은 유한하다. 그는 아직 샤방하지만, 사실 스물다섯은 요즘 아이돌에 비춰 어린 나이는 아니다. 장근석의 다음 작품은 윤석호 PD가 연출하는 한류 드라마 가 될 듯하다. 그리고 그다음은? 장근석이기에 가능한 영역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브래드 피트는 스티븐 소더버그를 만나 배우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고,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자신을 변주해가며 살아남았다. 세월의 옷을 덧입으며 배우로 거듭나야 지속적 성장과 발전을 담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제 그가 디뎌야 할 다음 행보를 점쳐봄직하다.
공세현 CJ오쇼핑 PD·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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