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식민지 종주국인 일본에서 태어난 나는 원래는 모어여야 할 언어(조선어)를 이미 박탈당하고 과거 종주국의 언어를 모어로 해서 자라났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일본어로 생각하며 모든 것을 일본어로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일본어라는 ‘언어의 벽’에 갇힌 수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감옥에 갇혀 있는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좀더 넓은 곳으로 나가고 싶었고 이전에 갈기갈기 찢어진 동포들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싶어 번민의 나날을 보내왔습니다.”
언어 내셔널리즘의 폭력
재일 조선 지식인 서경식 도쿄경제대학 법학부 교수는 1995년 이란 작품으로 일본 에세이스트 클럽상을 받았다. 수상 이유는 “뛰어난 일본어 표현”. 이를 들은 그는 수상의 기쁨과 재일조선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 사이에서 혼란을 느꼈다. 그는 시상식에서 앞의 내용으로 수상 소감을 밝혔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에도 그는, 최근 출간한 (돌베개 펴냄)를 통해 “일본어로 문장을 쓰고 표현하면서 그 행위에 내재돼 있는 모순과의 긴장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
서 교수는 ‘머더 텅’(Mother Tongue)으로서의 모어와 ‘네이티브 랭귀지’(Native Language)로서의 모국어를 다른 개념으로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모어란 태어나서 처음으로 몸에 익힘으로써 무자각인 채로 자신 속에 생겨버리는 언어, 일단 몸에 익히면 그다음부터는 벗어날 수 없는, 근원적 언어다. 한편 국어란 국가가 정하는 것, 교육이나 미디어를 통해 주입하고 국민을 만들어가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언어다.
서 교수는 모어가 그 언어를 쓰는 이의 감정과 사고를 표현하는 언어이기 때문에 모어를 부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과 같은 디아스포라의 모어 속에는 덫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지만, 이 또한 그를 고뇌에 빠지게 만드는 사실이다. 그는 일본 국적을 취득한다면 충분히 일본의 ‘주류’ 인생을 살 수 있는 조건을 가졌음에도 스스로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버리지 않고 살아왔다. 그런 그에게 자신의 민족을 억압한 침략국의 관점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모어 속에 들어 있는 제국주의적 시선을 자신도 모르게 받아들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작용했다. 그는 모어로서 조선어(역자는 저자의 의향에 따라 한국은 대한민국을, 조선은 한반도 전체를 가리키기로 했음을 밝힌다)를 잃고 골수까지 일본 정서가 침투해 있다는 게 괴롭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였던 다른 학자들의 예를 통해 위로받고, 태생적 언어인 모어의 기능을 인정하며, 대안을 찾는다. 시 ‘죽음의 푸가’로 유명한 독일 시인 파울 첼란은 1920년 동유럽 부코비나 지방의 체르노프치라는 다민족·다언어·다문화 지역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이 지역은 나치 독일의 침공을 받게 되는데, 첼란은 1년 이상 강제 노역을 하고 강제수용소에서 부모 또한 잃는다. 전쟁이 끝나고 첼란은 독일어로 시를 쓴다.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를 죽인 자들의 언어로 시를 쓴다”고 비난한다. 이에 첼란은 “모어를 통해서만 자신의 진실을 말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서 교수와 첼란은 글로든 말로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때, 몸속 깊이 스며든 모어를 쓰기 꺼려지기가 여러 번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딜레마에 빠졌던 이유는 ‘모어=국어’라는 언어 내셔널리즘 때문이다. 따라서 서 교수는 모어 사용자의 정체성을 폭력적으로 확정하는 언어 내셔널리즘의 공식을 깰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언어에서 나와 너를 가르는 기준을 찾을 것이 아니라 모어에 담긴 다수자의 시선을 치열하게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시름하는 일본, 변화의 시대 오나
서 교수는 이번 출간에 앞서 2005년 한국에서 첫 번째 평론집 를 펴냈다. 두 가지 목표로 쓰인 책이었다. 한국 독자에게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고, 디아스포라의 눈으로 본 ‘국민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해 ‘민족’ ‘국가’란 틀을 새로운 발상으로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 올해 출간된 는 앞의 책의 목표를 또렷이 계승한다.
총 4부로 나뉜 구성 중 1·2부는 언어 내셔널리즘, 그리고 이를 통해 지속되고 있는 식민주의에 대한 고민을 담았고, 3부는 일본 진보 지식인의 사상적 퇴락에 대한 비판을 실었다. 특히 3부의 서두에 실은 ‘네 번째 호기’는 1989년 1월 일왕 히로히토가 사망했을 때 잡지 에 기고한 글인데, 서 교수는 이 글에서 “침략과 수탈의 역사를 자기부정하는” 일본인을 비판하며 일본의 우경화를 예견했다. 20년도 전에 쓴 이 글이 2011년 출간된 책에 실릴 수 있었던 이유는 변하지 않고 오른쪽만을 향하는 일본이 현재하기 때문이다. 4부에는 대담이 실렸다. 서울 체재 중이던 2008년 1월 최현덕 부산대 인문학연구소 HK교수와 ‘새로운 통일의 꿈’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민족 통일을 위한 협의체 조직, 한국의 이중국적 허용 등 저자 나름의 통일 구상을 내놓았다.
일본 사회의 소수자임과 동시에 식민 지배의 산 증인인 재일조선인 서 교수는 이번 책에서 2006년 성공회대 연구교수로 재직한 시절의 ‘모국 체험’을 전후한 10여 년간의 정치적·역사적·철학적 사유와 성찰을 정리했다. 시의성이 강한 잡지에 실리는 보통의 기고문은 이 정도 시간이 지났다면 낡고 오래된 글이 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2011년 책으로 정리돼도 어색하지 않음은 앞서 말했듯 한국과 일본의 관계, 과거에 대한 일본의 태도 등이 그다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2011년의 일본은 대지진과 쓰나미, 후쿠시마 원전 방사성 물질 유출 문제 등으로 심하게 앓고 있다. 많은 한국인이 일본의 아픔에 공감하며 도움의 손길을 보낸다. 한편 최근 검정 통과된 일본 중학교 사회 교과서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을 주장한다. 2011년의 사건들은 한-일 관계에 호재일까, 악재일까. 인도주의적 공감이라는 ‘보편’과, 뿌리깊은 역사적 갈등에 따른 ‘특수’는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서 교수가 언젠가 한국에서 세 번째 평론집을 낸다면 그의 책에는 어떤 글들이 실리게 될까.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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