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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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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는 모든 것은 같은 지위를 가진다

야생을 여행하며 자연적 삶이 궁극적인 민주주의임을 깨우친

제이 그리피스의 <땅, 물, 불, 바람과 얼음의 여행자>
등록 2011-03-25 14:29 수정 2020-05-03 04:26

위안과 극복이 공유되는 시간이다. 무시무시한 자연재해를 겪고 흐느끼는 이웃을 향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고통받은 이의 마음을 다독이는 손길을 건넨다.
우리는 일본 대지진에서 자연이 가진 끔찍한 파괴력을 보았다. 몇만 명의 목숨을 단숨에 끊어내는 무시무시한 절망은 2004년 인도양 연안을 강타한 쓰나미, 2008년 중국 쓰촨성 대지진 때도 보았다. 그럼에도 인간이 자연에 등 돌릴 수 없는 이유는 인간에게 무한한 치유와 회복의 힘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은 세상에서 가장 양면적인 존재다. 지금 당장은 발 아래 땅과 저 먼 바다를 향해 원망의 눈빛을 쉬이 거두기 어렵겠지만,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혹은 다음 세대는 자연에서 무언가를 얻고 고통에 대한 위로를 받으면서 지금 겪은 절망의 감정을 조금씩 감해갈 것이다.

길을 잃고 여행을 시작하다

영국의 대안 잡지 , 미국의 진보 잡지 등에 글을 기고하는 영국의 논픽션 작가 제이 그리피스는 운 좋게도 자연을 통해 ‘황무지’ 같던 자신의 영혼을 치유받았다. 우울증에 시달려 걸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는 상태에 놓인 그는 페루에 가서 주술사들을 만나보라는 한 인류학자의 권유에 따라 아마존을 헤치고 주술사를 찾아간다. 그리고 지도 바깥으로 “길을 잃으면서” 여행이 시작된다. (알마 펴냄)는 총 7년간의 모험에 대한 낱낱한 기록이다.

거대한 야생의 숲 아마존에서 제이 그리피스는 ‘궁극적 민주주의’의 모델을 찾았다.한겨레21 윤운식

거대한 야생의 숲 아마존에서 제이 그리피스는 ‘궁극적 민주주의’의 모델을 찾았다.한겨레21 윤운식

그리피스는 고대 그리스 땅의 네 가지 원소인 흙, 공기, 불, 물에 얼음을 더해 여행의 밑그림을 그렸다. 아마존과 안데스산맥에서는 숲과 땅을, 캐나다의 에스키모 거주지와 북극의 빙하에서는 얼음을, 인도네시아 바닷가의 집시 마을과 심해 탐험을 통해서는 바다를, 오스트레일리아의 모래사막에서는 황폐함이 아닌 아름다운 황금빛 둔덕을 체험한다. 가공되지 않은 “빙하의 얼음에 뺨을 대보고 맨살에 내리쬐는 태양, 몸속으로 밀려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조수를 느끼며” 그는 도시의 일상에서 버석하게 메마른 정신을 위로받고 야생의 언어를 배우며 자연과 교감했다.

그리피스가 지나온 여행지는 대체로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다. 여행이란 어차피 낯선 공간을 향한 열망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겠지만, 지금 우리의 여행 방식이 어떤지 떠올려보자.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여행 기사나 서점의 한쪽 벽면을 빼곡히 채운 여행책자를 통해, 우리는 가보지 않은 공간에도 이미 익숙해져버렸다. 여행은 이제 새로운 영역을 탐험하는 것이 아니라 인쇄물이나 영상에서 본 장소를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다시 한번 확인하러 가는 일정으로 채워진다.

제이 그리피스의 <땅, 물, 불, 바람과 얼음의 여행자>

제이 그리피스의 <땅, 물, 불, 바람과 얼음의 여행자>

그리피스의 여행지는 문명화하지 않은 곳이기에 문명의 이기를 통해 접하기 힘든 공간들이다. 이 어리둥절한 공간을 채운 사람들은 자연과 가장 밀착해서 살아가고 있었다. 이국적인 것을 뛰어넘는 생소한 언어와 장소들이 그의 여정을 채운다. 그리피스는 아마존강에서 ‘페크페크’라 불리는 작은 통나무배를 타고 ‘아샤닌카’라는 페루의 원주민 부족을 찾아나선다. 아샤닌카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 아마존을 처음 경험한 그리피스는 흥분한 음성으로 삭막한 도시에서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놀라운 감각들을 전한다. 비에서 나는 미세한 안개 냄새, 나무의 수액 냄새, 꿀처럼 달콤한 꽃의 향과 무겁고 사랑스러운 햇빛의 향…. 안개와 나무와 꽃은 도시에 사는 우리 곁에도 일상처럼 존재하지만 우리는 아무도 이들이 뿜어내는 자연의 향취를 맡을 수 없다. 자연스럽지 못한 공간에 놓인 어색한 ‘자연’들이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 그 근해에 놓인 또 다른 한 작은 섬의 끝머리에서는 바다 집시 바조족을 만난다. 바조족의 생활은 대부분의 생을 땅을 딛고 지내는 우리가 감히 ‘일상’이라 정의 내린 것과 모습이 다르다. 바조족은 바다 뒤로 솟은 돌 위나 평평한 산호 위에서 요리를 하고 거의 모든 시간을 바다 위에서 보낸다. 배 위에서 자고 여자들은 바다에서 아기를 낳기도 한다. 몸이 아프면 바다에서 나는 약재로 치료한다. 이들이 출렁이는 바다 대신 평평한 뭍에 발을 디딜 때는, 학업을 위해 육지로 나가거나 담수를 모으거나 죽은 이를 매장하러 갈 때뿐이다.

꽃가루의 의견에도 귀기울이는…

야생의 야생을 향하는 여정도 개발과 파괴의 현장을 비켜나진 못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구리광산 기업이자 세 번째로 큰 금광회사인 미국계 프리포트맥모란사는 1990년부터 웨스트파푸아의 광산에서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매주 옮기는 것에 맞먹는 양의 돌을 반출한다. 텅 빈 동굴은 쓰레기와 중금속으로 채워진다. 아마존 원주민들이 전통처럼 쌓아온 약초에 대한 지식은 다국적 제약회사에 의해 착취되고 파헤쳐진다. 아마존에서 공유되던 지식들은 어느덧 특허법 등을 통해 기업의 것으로 사유화됐다. 이런 현장을 목격했을 때, 강처럼 유연하게 흐르던 그리피스의 목소리에도 뾰족한 날이 선다.

그리피스는 자연의 힘에 놀라고 그 아름다움에 자기도 모를 찬탄을 터트리지만 호들갑 떨며 예찬을 늘어놓진 않는다. 7년여의 여정을 인위적인 도시 생활에 대한 보상처럼 여기지도 않는다. 대신 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식물과 동물과 인간, 꽃가루와 딱정벌레의 발언권도 존중하며 지구를 구성하는 모든 숨 쉬는 것들에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자연이야말로 가장 궁극적인 민주주의 모델임을 깨우쳤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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