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운동을 하고 사직공원을 내려오고 있었다. 트위터가 데이비드 세다리스로 시끌했다. 그의 팬이 이렇게 많았나? 신작이 그렇게 재미있나? 확인해보지 뭐. (웅진지식하우스 펴냄)를 들춰보기 위해 교보문고로 발을 옮겼다. 그러다 종로 도서관 앞을 지나게 되었다. 세다리스를 검색해볼까? 라는 책이 있었고, 배가 출출했다. 요기나 하며 먼저 이 책을 읽자. 그렇게 후루룩 다 읽어버렸을 즈음,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혹시나 하며 검색에 들어갔다. 그랬구나. 은 9년 전에 나온 이 책을 새로 번역해 내놓은 거였다.
새삼 신기해졌다. 그때는 소리 소문 없었는데, 이제는 시끌시끌하다니. 드디어 한국도 세다리스의 유머가 먹힐 만한 지역으로 접어든 건가? 나만 해도 9년 전에 이 책을 읽었다면 지금만큼 낄낄대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사이 나는 비자 없이 미국에 갈 수 있게 되었고, 1년에 수십 편의 미국 드라마 시리즈를 보게 되었고, 페이스북으로 미 대륙 곳곳의 친구들을 사귈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이라는 땅도 제각각이고, 미국인이라는 족속도 별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세다리스가 미 대륙의 바보들이 우리만큼이나 멍청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니 참 좋은 거다.
시카고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자신의 일기를 읽어주는 걸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는 작가. 역시 시시콜콜한 체험들이 책을 채우고 있다. 일단 그가 가장 좋아하는 플레이는 가족을 팔아먹는 짓이다. 타고난 엔지니어인 아버지는 아이들이 모래성을 쌓으면 아치형 천장의 역학에 대해 강의했고, 자녀들을 대상으로 선탠 대회를 개최한 어머니 덕분에 여동생 그레첸은 ‘샘소나이트 증후군’이라는 특별한 피부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가족 중에서도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존재를 놀려먹는 걸 좋아한다. 바로 자기 자신. 특히 그의 예술가 편력이 재미있다. 가족 밴드를 만들겠다는 아버지의 무모한 시도 때문에 기타를 배우는데, 입만 열면 여자 타령인 난쟁이 선생이 그를 포기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동생에 대한 질투 때문에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는데, 회화·판화·조각으로 이어진 연이어 좌절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만은 그의 편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도예 작품을 전했는데, ‘개 밥그릇으로 딱 좋겠다’는 우호적인 평가를 해주었다. 뉴욕 주립대학 근처에서 개념 예술을 알게 된 뒤에는 온갖 해프닝이 이어지는데, 우리 미술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닭짓들이어서 정답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다음은 세상의 멍청이들이다. 파리의 지하철에서 만난 미국 관광객은 세다리스를 소매치기로 오해해 영어로 온갖 험담을 늘어놓는다. 노르망디의 축제에서는 어느 금발 여자가 고장난 놀이기구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는 걸 목격하는데, 사람들은 사육제의 풍경인 양 모여들어 구경한다. 뉴욕에 온 남부 친척들은 ‘막 입는 옷’ 차림으로 플라자 호텔에 가서 하이 티를 마시고자 하는데, 분명히 쫓겨날 거라는 작가의 우려와는 달리 트레이닝복 차림의 일족들과 즐겁게 사진을 찍고 논다. “저 사람들은 정말 멋진 뉴욕 시민들이야.” 작가는 그들 중 누구도 뉴욕 시민이 아니라고 설명하려고 했으나 헛수고였다.
세다리스의 유머는 미국적이면서 또 미국적이지 않다. 오히려 영화 에 나오는 줄리 델피의 프랑스 가족 같다. 그들은 딸의 남자친구의 벌거벗은 사진을 돌려보며, 꽉 막힌 뉴욕 남자를 비웃는다. 원래 세다리스가 이런 세다리스였는지 모르겠지만, 파리의 생활이 그의 재능을 단련시키는 데 꽤 도움을 준 것 같다. 비록 ‘옷도 벗을 줄 모르고 이따금 바보짓으로 웃음거리도 되지 못하는 무생물에 성을 붙이는’ 언어를 통해서였지만 말이다.
저술업자
<font color="#1153A4"> *‘이명석의 웃긴 책 열전’은 이번호로 마칩니다. 이명석씨가 이어갈 더 재미있는 새 연재를 기대해주세요.</font>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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