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고교 동창들이 모인 자리였다. 다들 오랜만에 만난 터라, 정겹고도 독한 별명들을 불러댔다. 그러다 한 녀석이 “내 별명을 지은 게 누구였더라” 하며 없는 머리를 긁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둘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동창생들 별명의 90%를 지어낸 범인이 바로 나였다. 녀석들이 따지고 들었다. 어쩌면 남의 약점을 꼭 집어서 평생 따라다닐 이상한 별명을 붙였냐고. 나는 항복했다. 그럼 너희가 내 별명을 지어보라고. 나의 갖가지 약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 둔한 중년 남자들의 머리에서 귀에 쏙 들어오는 별명이 탄생할 수는 없었다.
전성태가 에세이집 에서 말하는 그 ‘동네 할아버지’를 우리가 만났다면 이런 분란은 없었을 것이다. 이 책 제목은 바로 작가의 어린 시절 별명이기도 한데, 그 할아버지의 기발한 작명 공식에 따라 나온 것이란다. 동네 아이들 모두 이런 식의 별명을 얻었는데, 거기에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모두가 그 별명을 얻으려고 떼를 쓰기까지 했다나. 어쨌든 그 공식에 따르면 나의 별명은 ‘명석 망석 부리붕석’ 혹은 ‘멍돌 망돌 부리붕돌’ 정도가 될 것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주위에서 이야기가 없어졌다. 이야기 없어진 자리에는 흉흉한 사건만 남았다. 재담 자리에 개그가, 풍류 자리에 유흥이 판을 친다.” 작가는 이런 생각 때문인지, 자신이 어린 시절 겪었던 온갖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소설가인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주운 이야기’란다.
1969년생에 전남 고흥 출신이 쓴 이야기인지라 요즘 도시 아이들은 상상도 못할 일들이 펼쳐진다. 그 시절의 많은 이들처럼 작가의 어머니도 푸념이 많았다. 특히나 아들을 다섯이나 낳은 신세한탄이 다섯째 아들의 마음을 짓눌렀다. “니라도 밑 찢어져 나왔어도 숨 좀 돌리고 살았을 건디.”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오리나무 숲에서 새를 잡아왔다.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자지 물어갈 새제 뭐겄냐.” 작가는 그걸 확인하려고 그랬는지 고무줄 바지를 내렸다가 자지러지고 말았다. “참말로 꽉 물어부렀다.”
모내기로 눈코 뜰 새 없는 철에 학교에서 두발 검사를 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마을 공용의 바리캉을 빌려와 투덜대며 작가의 머리를 직접 깎기 시작했다. 뻑뻑한 칼날에 머리칼은 통째로 뽑히고, 그나마도 절반쯤 깎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고선 200원을 쥐어 이발소로 보냈단다. 당시 어린이 이발 비용이 500원이었는데 말이다. “반만 깎아주고 제값을 다 받으면 그 이발사는 도둑놈이재.” 이발사는 촌사람들이 제 손으로 머리를 깎는 게 얄미웠던 터라, 이런 흥정에 코털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결국 교실은 웃음바다가 되고, 어린 작가는 그 속에서 대성통곡을 했다고.
이쯤에서 내가 주운 이야기도 한 토막 흘려본다. 몇 년 전 유럽의 크리스마스 시장에 갔을 때 친구가 장난감 나무 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나, 이거 우리 어릴 적에 갖고 놀던 건데.” “그래?”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진짜 뱀이 있는데, 왜 가짜 뱀을 갖고 노냐?” 작가 전성태는 말한다. “간혹 어린 시절을 얘기하는 자리에 앉다 보면 내 체험과 기억이 열댓 살은 윗줄인 선배들과 나란할 때가 많다.” 나는 작가보다 겨우 한 살이 적은데, 그래도 읍내 출신인 때문인지 그 터울이 7~8년은 돼 보인다. 그리고 동갑내기인 서울 친구와 내가 7~8년의 차이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런 기묘한 시차가 문화적 충돌을 만들어내고, 그 부딪힘 속에 웃음이 비어져나온다. 요즘의 20대에겐 또 얼마나 엉뚱한 이야기로 들릴까.
얼마 전 ‘남자의 자격’에서 이경규와 개그맨들이 ‘초심으로 돌아가자’며 에서 선보일 콩트를 짜내려고 애쓰는 장면이 있었다. 나름 복고풍 코미디를 끄집어냈는데, 후배들 앞에서 망신만 당한다. 그러나 전성태가 주워온 이야기는 다르다. 군내 나는 그 시절의 재담이 작위적인 버라이어티쇼보다 훨씬 신선하다. 같은 생활 속의 사건이라도 처럼 대놓고 양념을 치지도 않았다. 그저 덤덤히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그게 짠하게 웃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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