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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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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림당하려면 제대로 당해야지



인생의 사소한 부조리를 웃음의 힘으로 밀고 나가는 〈개를 위한 스테이크〉
등록 2010-09-15 11:46 수정 2020-05-03 04:26
〈개를 위한 스테이크〉

〈개를 위한 스테이크〉

“아빠, 지구는 왜 태양 주위를 돌아요? 사실 아빠도 모르죠?” 고생고생해서 자식을 학교에 보내놨더니 아버지를 이따위로 본다. “여보, 약국 가서 관장약 달라고 하면 된다니까요. 왜 그걸 말 못해요?” 마누라는 남자의 체면은 생각도 않고 이상한 심부름을 시킨다. “이보게, 자네는 다음 택시를 타면 되지 않나. 젊은 사람이.” 머리에 새치 두어 개 더 났다고, 우산을 팡팡 털며 비 맞고 있는 나를 새치기한다. 이럴 때는 피가 머리꼭지까지 치솟는다. 그래, 시인 김수영도 말하지 않았나?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이스라엘의 작가 에프라임 키숀은 좀 다르다. 그는 우리 인생, 특히 소시민 중년 남자의 삶이 언제나 사소한 위기들에 노출돼 있음을 잘 안다. 그는 김수영처럼 자조한다. 그런데 자신에 대한 비웃음을 더 극적으로 밀고 간다. 스스로를 바보로 만들어 이 위기를 탈출하는 놀라운 마술을 보여준다. 그래 인생은 원래 이상한 거야. 온갖 부조리로 가득 차 있지. 바로 (마음산책 펴냄) 같은 거란 말이야.

작가는 주말마다 ‘잘나신 아내와 세 명의 아이들’을 모시고 유명 레스토랑으로 간다. 그리고 거대한 스테이크 조각 앞에서 도전의 의지를 불태운다. 스테이크는 맛있다. 하지만 덩치가 너무 크다. 몇 번을 도전해도 어른조차 절반을 먹을까 말까다. 당연히 버리기엔 아깝다. 그래서 꾀를 냈다. “이걸 좀 싸주세요. 집에 있는 개에게 갖다주게요.” 친절한 주인은 스테이크를 정성스럽게, 아니 필요하지도 않은 정성을 덕지덕지 붙여 싸준다. “뼈도 몇 조각 넣었습니다.” 개는 포식을 했다. 서비스인 뼈와 내장을 깡그리 흡입했다. 다만 스테이크는 발끝도 대지 않았다.

이런 식의 짧은 콩트들이 정말 남의 일 같지 않다. 기상청에서 몇 달 만에 날씨가 갠다고 하기에 미뤄둔 빨래를 몰아서 했지만 비는 주룩주룩이다. 온 집안에 널어둔 빨래에서 곰팡내가 나는데 갑자기 중요한 손님이 들이닥치고, 옆방으로 옮겨놓은 빨래더미에서는 물이 넘쳐 홍수가 난 줄 안다. 집안에 생쥐가 기어들어와 잠을 못 이루는데, 고생고생해서 덫을 놓아 그놈을 잡았더니 아내가 “살인자”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런 타박도 억울한데, 이제 쥐가 벽을 갉아먹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너무 조용해 잠이 오지 않는다.

특히 아이들이 말썽이다. 오랜만에 부부만 오붓하게 여행 가기 위해 아이들에게 “영국 여왕의 초대를 거절할 수 없다”면서 적당히 둘러대고 떠났다. 그런데 유럽에만 있는 ‘가로줄무늬 추잉껌’을 사다주겠다는 약속을 잊어버렸다. 2m짜리 기린 인형으로 해결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그건 어른들 세계의 거래 방법이다. 아이들에게는 기린은 기린이고, 껌은 껌이다. 그리고 꼭 가로줄무늬가 있어야 한다.

출판-이명석 웃긴 책 사진

출판-이명석 웃긴 책 사진

작가는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조금씩 과장하면서, 우리 자신을 코미디 극장의 배우로 만든다. 사는 게 그렇잖아. 아무리 돈 잘 벌고 잘난 척 거들먹거려도 상상도 못한 일에 뒤통수 맞기 십상이라고. 하지만 자기가 연극 속의 배우라고 생각해봐. 네가 더 크게 넘어질수록 관객은 더 크게 웃을 거야. 놀림당하려면 제대로 당해야지.

어처구니없는 상상력과 터무니없는 장난기도 필요하다. 애국심으로 사온 국산 세탁기가 빨래만 하면 요동을 치고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선, 아예 살아서 돌아다닌다고 여긴다. 옆집 사람이 라디오를 시끄럽게 틀어대는 통에 밤낮이 괴롭던 차에, 우리 집 전기면도기를 켜면 옆집 라디오가 크르르르 하며 굉음을 울린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당황하는 옆집 남자를 곯려주기 위해 마치 라디오가 살아서 사람 말을 알아듣는 듯이 몰아간다.

인생은 언제나 사소한 위기들에 기습당한다. 요행히 지나갔다 싶어도, 30년 전에 친척에게 선물했다가 이집 저집 떠돌다 오늘 내 생일에 찾아온 초콜릿 상자처럼 되돌아온다. 그때마다 발끈한다고 무슨 소용이랴? 작은 불행을 코미디로 만들고 스스로 작은 바보가 되어버리자. 그 분노를 모으고 썩혀서, 언젠가 진짜 큰 바보의 얼굴에 시원하게 던져버리자.

이명석 저술업자

*저술업자 이명석씨가 ‘이주일을 웃겼다’ 연재에 이어 ‘이명석의 웃긴 책 열전’으로 독자를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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