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라면 겪게 되는 일로/ 애증이 엇갈릴 때/ 그리하여 문득 슬퍼질 때/ 한바탕 사랑싸움이라도 벌일 듯한/ 투구꽃의 도발적인 자태를 떠올린다// 사노라면 약이 되면서 동시에/ 독이 되는 일 얼마나 많은가 궁리하며/ 머리가 아파올 때/ 입술이 얼얼하고 혀가 화끈거리는/ 투구꽃 뿌리를 씹기도 한다(후략).” 최두석 시인이 여섯 번째 시집 (창비 펴냄)에 실린 ‘투구꽃’ 낭송을 시작하자 객석 위로 팔을 뻗은 소나무가 시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종이에서 몸을 일으킨 글자는 하나둘씩 차가운 밤공기를 타고 조용히 객석으로 전해졌다.
최 시인에 이어 손택수 시인이 시집 (실천문학사 펴냄)에 수록된 시 ‘나무의 수사학3’을 담담한 목소리로 낭송했다. “식육점 간판을 가리다/ 잘려나간 나뭇가지 끝에/ 물방울이 맺혀 있다/ 흘러갈 곳을 잃어버린 수액이/ 전기 톱날자국 끝에 맺혀 떨고 있는 한때/ 나무에게 남아 있는 고통이 있다면 이제는/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중략) 허공 속에 아직도/ 실핏줄이 흐르고 있다는 듯/ 내려앉지 못하고 날갯짓/ 날갯짓만 하다 돌아가는,” 손 시인의 시가 쉼표로 끝을 맺었고, 쉼표의 여운은 아주 잠시 객석에 머물다가 사라졌다.
2005년 프랑크푸르트에서 감염된 열기
10월28일 저녁 7시30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자리한 연희문학창작촌 야외무대에서 아홉 번째 연희목요낭독극장이 ‘時月, 꽃과 나무의 결별을 듣다’라는 제목으로 열렸다. 서울시창작공간 연희문학창작촌은 지난 2월부터 매월 마지막 주 목요일에 낭독극장을 진행해왔다. 낭독극장은 소설가와 시인의 낭독과 음악·무용·연극 공연 등으로 진행된다. 올해의 낭독극장은 다음달을 마지막으로 잠시 겨울방학에 들어가고, 내년 3월에 다시 시작한다. 다음달 낭독극장은 소설가 하성란과 시인 정우영이 신작을 읽는 자리로 꾸며진다.
연희문학창작촌 안현미 실장은 “어떻게 문학으로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낭독을 매개로 가깝게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게 됐다”며 “성우나 아나운서만큼 정확하게 읽는 건 아니지만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읽어내려갈 때만 느낄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설명했다. 작가가 전하는 육성의 힘 때문인지 낭독극장이 열리는 야외무대 객석은 매번 관객으로 가득하다.
어느 때보다 ‘책 읽어주는 작가’를 자주 만날 수 있는 요즘이다. 국내에 좀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했던 낭독 문화가 최근 다양한 방식과 매체를 통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신간을 낸 작가가 독자를 앞에 두고 책을 읽는 낭독회다. 사인회나 강연회 등으로 진행됐던 신간 출간 행사는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낭독과 함께 콘서트를 여는 북콘서트뿐 아니라 뮤직비디오 낭독회, 1시간 하드코어 낭독회, 음악감상 낭독회 등 다채로운 형식으로 변신 중이다.
최근 소설 (문학동네 펴냄)를 출간한 조경란 작가는 와인을 마시며 낭독하는 와인낭독회, 소설의 일부분을 배우와 함께 역할극으로 읽는 낭독회 등 다양한 형식의 낭독회를 진행해왔다. 조 작가는 국내에서 낭독회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때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한국이 주빈국이던 2005년으로 꼽는다. “2005년 독일에서 자전소설인 ‘코끼리를 찾아서’를 낭독했던 때를 잊을 수 없어요. 독일 관객 앞에서 한국어로 낭독했는데도 많은 이들이 집중하며 듣더라고요. 낭독을 통해 소설에 담긴 감정을 이해했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조 작가는 이후 국내뿐 아니라 미국·유럽 등을 돌며 낭독할 기회가 많았다. 지난해에는 미국의 6개 대학을 돌며 낭독회를 열기도 했다. 조 작가는 “관객이 돈을 내고 표를 사서 낭독회에 오는 낭독 문화가 자리잡은 외국은 관객과 작가 모두 낭독에 적극적”이라며 “정해진 시간을 불필요한 침묵 없이 알차게 사용한다”고 말한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작가가 새 책을 내면 투어 형식으로 서점·도서관·대학 등을 돌며 낭독회를 한다. 대부분의 낭독회가 유료임에도 유명 작가의 낭독회 표는 콘서트 표가 매진되듯 순식간에 팔려나간다.
조 작가는 낭독의 즐거움을 이렇게 설명한다. “장편이든 단편이든 글을 다 쓰면 소리 내어 읽으면서 정리를 해요. 단어나 문장을 더 매끄럽게 정리할 수 있거든요. 그렇게 완성한 텍스트를 낭독할 때는 마지막에 남은 단어들을 읽는 거라 그런지 더 각별해요. 제가 쓴 작품이라도 낭독할 때는 새롭게 느껴져요. 읽으면서 작품에 빠져들면 저절로 감정이입이 되고, 제 정체성과 글이 일치되면서 낭독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거죠.” 독자와 함께하는 낭독회는 더 소중하다. 텍스트를 가운데 놓고 독자와 소통하는 순간이 쌓이면 문학의 문화가 생겨나는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낭독회가 행사적 성격이 강하다면 앞서 소개한 연희목요낭독극장처럼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낭독회는 그야말로 낭독 문화의 토대다. 정기 낭독회가 열리는 곳이 지역 도서관이라면, 게다가 서울이 아니라면 더욱 그러하다. 경기도 고양아람누리도서관은 고양시에 거주하는 작가를 초대해 낭독의 자리를 갖는 ‘낭독으로의 초대’를 2008년부터 매달 진행하고 있다. ‘고양시 지역 작가’라고 해서 얕봤다가는 큰코다친다. 소설가 김연수·윤대녕·김인숙 등이 초대 작가다. 우리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들이 이 도서관을 찾는 건 국내 작가 중 유독 일산 지역에 거주하는 작가가 많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지면에 발표되지 않은 작품을 직접 듣는 행운을 만나기도 한다. 김연수 작가는 2008년 ‘낭독으로의 초대’에서 단편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가장 먼저 공개하기도 했다. 11월과 12월에는 각각 함성호 시인과 소설가 은희경 작가가 초대될 예정이다.
열린 공간에서의 낭독이 울림을 갖는다면, 거꾸로 작가의 목소리가 인터넷을 타고 독자 개개인에게 은밀하게 전해질 때는 깊이를 더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운영하는 사이버문학광장 ‘문장’(munjang.or.kr)에는 ‘문학라디오-문장의 소리’라는 코너가 있다. ‘국내 유일의 인터넷 문학전문 라디오’라는 제법 긴 수식어를 단 이 라디오는 말 그래도 작가가 진행하는 문학 방송이다. 매주 월요일에 업데이트된다. 2005년 5월 첫 방송을 시작한 ‘문장의 소리’는 김선우 시인에 이어 소설가 한강, 시인 이문재, 소설가 이기호, 소설가 김애란이 DJ를 거쳐갔다. 지난해 5월부터는 소설가 김중혁 작가가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프로듀서 역시 시인인 조연호 작가가 맡고 있다.
‘문장의 소리’는 매회 소설가나 시인 등 작가가 초대해 작가가 직접 작품을 낭독하는 시간을 갖는다. 가능하면 등단 10년 이내의 신인 작가를 초대하는 게 이 방송의 원칙이라면 원칙이다. 김중혁 작가는 “신인 작가들 중 방송 녹음을 하러 와서 처음 낭독을 하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며 “재미있는 건 작가들의 낭독이 작품과 묘하게 일치한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차분하고 꼼꼼하게 쓰는 작가는 꼭 그렇게 읽고, 활기차고 담대한 글을 쓰는 작가 역시 자기 글처럼 작품을 읽어요. 작가들마다 각자의 낭독법이 있는 것 같아요. 작품의 뉘앙스를 가장 잘 알기 때문이겠죠. 작가들이 직접 자기 작품을 읽는 것만큼 좋은 게 없어요. 성우나 아나운서가 읽으면 이야기만 도드라져 소설이 극이 되기 쉬워요. 반면 작가가 읽을 때는 문장의 세밀함이 목소리로 드러나죠.”
인터넷 라디오에서 한발을 더 내디딘 매체는 팟캐스트(podcast)다. MP3 플레이어 ‘아이팟’(ipod)의 ‘팟’(pod)과 방송을 뜻하는 ‘브로드캐스팅’(broadcasting)의 ‘캐스트’(cast)의 조어인 팟캐스트는 오디오나 비디오 파일을 정기적으로 자동 다운로드해 들을 수 있는 방송이다. 아이폰이 대중화되고 국내 아이튠스 스토어에 팟캐스트가 문을 열면서 더 많은 이들이 손쉽게 들을 수 있는 형태의 파일이기도 하다. 국내 팟캐스트 중에 눈에 띄는 방송이 있다. 소설가 김영하가 제작하는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다. 팟캐스트 제목 그대로 김영하 작가가 직접 책을 읽어준다. 올해 1월 첫 번째 에피소드를 내보낸 이후 지금까지 23개 에피소드가 올라왔다.
김영하 작가는 에피소드마다 한 권의 책을 골라 부분을 발췌해 직접 낭독하고, 책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미시마 유키오의 나 프란츠 카프카의 등 고전부터 정이현의 최근작 (문학과지성사 펴냄)까지 지역과 시대를 뛰어넘은 작품을 김 작가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팟캐스트는 신작 발표의 장이 되기도 한다. 지난 4월에는 11번째 에피소드에서 자신의 단편 를 발표했다. 김 작가는 해당 에피소드에서 “아무 데에도 발표하지 않은 신작인데 팟캐스트에서 처음으로 공개한다”고 설명했다. 이 작품은 지난 7월 출간된 소설집 (문학동네 펴냄)를 통해 책으로 묶여나왔다. 김 작가는 팟캐스트 관련 인터뷰에서 “원래 입에서 입으로 이어지면서 귀로 들었던 게 문학의 원형”이라며 “팟캐스트에서 책을 읽으면서 문학의 힘을 복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가을에는 하늘이 높아서인지 유난히 소리의 꼬리가 길다. 얼마 남지 않은 가을, 눈이 아닌 귀로 문장의 소리를 따라가보는 건 어떨까. 따라가다가 좋은 작가와 작품을 만나는 것은 덤이다.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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