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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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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FF를 3분으로 만든다면?



부산국제영화제를 배경으로 한 ‘초단편영화’ 촬영 도전기…
영화제 9일을 담는 데 3분은 끔찍하게 긴 시간이라네
등록 2010-10-20 18:21 수정 2020-05-03 04:26


잘 찍지도 못하면서 - 부산에서 영화를 찍다



#1. 영화를 찍으란다

“부산에 가서 영화를 찍어보는 건 어때?”

“…네?”

농담인 줄 알았다. 하긴 내가 한동안 너무 징징댔다. 부산국제영화제(PIFF) 출장 계획을 잡아놓고 선배에게 “가서 뭐 쓸까요?” 하며 줄기차게 물고 늘어지던 차였다. 올해로 15회를 맞은 부산국제영화제는 그곳을 찾는 모든 기자에게 부담 그 자체다. 부산이라는 도시와 영화라는 매체를 엮어 쓸 수 있는 모든 기사는 지난 15년 동안 나올 만큼 나왔다. 삽질이라도 해볼 땅도 남지 않았다. 게다가 은 해외 감독의 영화 세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영화 전문지도 아니고, 영화제의 새로운 소식을 담는 일간지도 아니다. 심지어 나는 영화 담당을 해본 적이 없다. 다시 말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는 게 처음이라는 얘기다. 엎치고 덮친 데를 때리고 또 때리는 것과 뭐가 다른가. 아마 선배는 이런 나에게 웃음을 되찾아주기 위해 농담을 하는 거라고 믿고 싶었…는데 이런, 내가 틀렸다.

맞은편 책상에서 뚜벅뚜벅 걸어온 선배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서울국제초단편영상제도 곧 하잖아. 지금 아이폰4 필름 페스티벌도 하고. 그러니까 직접 부산에 가서 스마트폰 같은 걸로 정말 짧은 영화를 한 편 찍어보는 거야. 부산영화제와 관련된 내용으로 시나리오도 써서 말이야. 그리고 제작기를 써보는 거지.”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영화가 별거야?” 했다. 내가 바보였다. 영화 에서 귀신이 눈앞으로 순식간에 다가오는 것처럼 영화 제작은 실제 기획안으로 완성돼 눈앞에 펼쳐졌다.

#2. 영화는 무엇으로 찍는가

어차피 찍는 거 한번 신나게 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뭘로 찍지? 그렇지, 아이폰4가 있다. 12명의 감독·촬영감독들이 아이폰4로 촬영한 단편영화를 상영하는 아이폰4 필름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지 않은가. 홈페이지에 가보니 아이폰4로 찍은 영화가 올라와 있었다. 임필성 감독은 아이폰4 보호필름을 소재로 라는 영화를 찍었고, 이호재 감독은 보통 세로로 사용하는 휴대전화의 특성으로 세상을 보는 시선을 이라는 영화에 담았다. 정정훈 촬영감독이 이준익 감독을 배우로 기용해 촬영한 의 메이킹필름에서 이준익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일반 관객들도 자기 자신이 감독도 되고, 배우도 되고, 때로는 시나리오작가도 되고. 여러 가지 놀이가 있지만 영화 찍는 놀이가 가장 재미있는 놀이, 그리고 싫증 나지 않는 놀이, 뭔가 남길 수 있는 놀이가 될 겁니다.” 나에게 건네는 격려나 다름없었다.

내친김에 페스티벌을 기획한 영화제작사 리얼라이즈의 김형민 프로듀서에게 아이폰4 촬영법에 대해 물어봤다. “휴대성이 좋은 게 장점이고, 줌이나 렌즈 사용이 힘들다는 게 단점이죠. 페스티벌에 참여한 감독들은 주로 DSLR 장비를 개조해서 아이폰4에 맞게 사용했어요. 일반인은 그런 장비를 사용하기 힘들잖아요. 조명이 따로 없다면 가능한 한 실외 햇볕에서 찍는 게 좋아요. 다큐멘터리는 극영화보다 더 편하게 촬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 그림을 만드는 데 집중하기보다 재미있게 찍어보는 게 아이폰4로 영화 찍는 걸 즐기는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아이폰4로 찍어보는 거야, 라는 다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아이폰4 물량이 없다는 뉴스가 생각났다. KT에 문의했지만 기자들을 위한 체험용 아이폰4는 이미 다 나갔다고 하고, 내가 신청한 아이폰4는 10월 말에나 도착한다고 했다. 아이폰4를 샀다고 자랑하던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려보았지만 도저히 “나 부산에 가서 영화 찍어야 하니 사흘 동안 네 휴대전화를 내놓아라”는 말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이폰4만 휴대전화인가. 나에게는 국내 보급률 최하인 블랙베리가 있다. 시험 삼아 사무실을 찍어보았는데, 720P 고화질(HD)급 화질을 자랑하는 아이폰4에는 턱없이 부족한 화질이었다. 고민하고 있는데, 선배가 자신의 디지털카메라를 내밀었다. ‘HD’라고 떡하니 써 있는 소니 DSLR다. 근거없는 자신감이 소폭 상승했다. 드라마도 디카로 찍는 세상 아닌가. 한 손에는 블랙베리를, 한 손에는 디카를 들고 본격적인 영화 제작에 돌입했다.

#3. 3분도 길다

초단편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쏙 들어왔다. 그래, 영화가 4분을 넘지 않는 초단편이 내가 갈 길이다. 3분이면 보통 극장에서 보는 영화의 3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뭘 해도 3분은 채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근거 없는 자신감은 다시 한번 소폭 상승했다. 11월5일 개막하는 제2회 서울초단편영상제 보도자료에는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고,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다!”고 적혀 있다. 출품작 시놉시스를 쭉 읽어봤다. 한 가정의 아침식사 풍경으로 미래사회를 재미있게 그렸다는 의 작가 윤태호 감독의 , 사랑은 다 거짓말이라는 여자에게 진지한 액션을 보여주려는 남자의 얘기를 담은 윤성호 감독의 등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읽어도 3분이라는 시간이 영화에서 어떤 시간인지 도통 와닿지 않았다.
윤성호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3분 안에 기승전결이 진행되어야 하는 거죠. 3분이 짧은 것 같지만 사실 긴 시간이에요. 단편이나 장편영화를 보면 낭비하는 시간이 많아요. 1분 동안 담배 피우고, 1분 동안 걷기도 하죠. 그렇게 낭비되는 시간을 다 걷어내고 3분 안에 이야기를 펼쳐내야 하는 초단편은 그런 의미에서 재미있어요. 자칫하면 영화가 아니라 광고 영상이 될 수 있다는 건 단점이에요. 캐릭터를 만들고 시나리오를 쓰는 건 초단편이라고 해도 장편과 똑같다고 생각해요. 장편에서 가장 좋은 장면을 가져온다고 생각해도 될 것 같아요.” 영화를 처음 찍어보는 이들에게 전할 만한 조언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혼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리 기계가 가벼워지고 길이가 짧아져도 영화는 여럿이서 함께 해나가는 작업이라는 뜻이다.
3분 남짓한 영화에 담을 얘기를 생각해내야 할 차례가 왔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를 찍는다면 어떤 얘기가 재미있을까? 영화제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제법 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를 배경으로 한 홍상수 감독의 처럼 감독이나 프로그래머 얘기도 괜찮을 것 같은데, 짧고 강렬한 얘기는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한 남자 대학생이 겪는 얘기는 어떨까? 음, 의 축약판이 될 가능성이 높다. 부산에 가면 뭔가 떠오르겠지.

영화 촬영에 도전한 기자가 부산에서 촬영한 영상의 스틸컷.

영화 촬영에 도전한 기자가 부산에서 촬영한 영상의 스틸컷.


#4. 여기는 부산, 오버
부산역에 도착했다(사진①). 서울에서 부산까지 KTX로 달리는 3시간 남짓 동안 뭔가 떠오르길 기대했지만, 역시 괜한 기대였다. 익숙한 영화 속 장면들만 처럼 편집돼 눈앞에 아른거렸다. 날씨가 좋다. 예감이 좋다. 가만, 배가 부르면 왠지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것 같아. 부산에 오면 꼭 먹겠다고 적어놓았던 냉채족발을 먹으러 국제시장으로 향했다. 족발집에서 족발을 써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보니 영감이 떠올랐다(사진②). 족발을 써는 남자와 족발을 먹는 여자의 사랑…? 부산국제영화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구나. 그럼 둘이 영화를 보게 하면 되지. 무리수다, 인정. 포만감과 창작은 별개다. 택시를 탔다. “해운대 가주세요.” 인상 좋은 택시 아저씨가 뜻밖의 얘기를 꺼내놓았다. “부산영화제 보러 오는 과정을 다 찍어놓으면, 그게 영화지.” 택시 아저씨가 틀어놓은 트로트 음악과 해운대 풍경이 묘하게 겹쳤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해운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무대인사 등의 행사가 열리는 피프빌리지 야외무대에는 배우와 감독에게 사인을 받으려는 이들이 길게 줄지어 늘어서 있고, 대담이 펼쳐지는 라운지에서는 화기애애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밤이 찾아오고, 정신을 차려보니 술잔 앞에 앉아 있었다. 제아무리 술자리가 즐거워도 영화에 대한 집념은 놓으면 안 되는 법. 술자리에 앉은 이들에게 물었다. “부산영화제를 배경으로 영화를 찍으면 뭘 찍고 싶어?” 기자·작가·프로그래머·감독·배우들의 대답은 각기 달랐다. “술 진탕 먹고 해운대에서 아침을 맞는 얘기면 끝이야, 끝.” “달맞이고개에 올라가봐. 거기 가면 뭔가 있을 거야.” “순수한 사랑 얘기 어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바닷가에서….” “잘 나가다가 영화 몇 개를 말아먹은 감독이 부산영화제에 와서 사람들을 피해다니는 얘기, 괜찮지?” 그들도 별수 없었다.
술자리에서 건진 게 있다면 흔쾌히 촬영을 해주겠다는 친구를 만난 것. 영화 제작에 책정된 예산은 0원이었다. 기껏해야 출장비를 아껴 보태는 정도? 예산이 없기 때문에 영화를 도와달라고 부탁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창피하니 이름은 밝히지 말아달라는 그 고마운 친구는 DSLR를 잡고 뭔가를 찍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평이 돌아왔다. “술자리가 어두워서 뭐가 잘 안 보여. 그리고 자꾸 손이 떨리네. 왜 이러지?” 왜 이러긴 이 양반아, 술을 마셨으니 그렇지. 카메라를 받아들고 촬영을 시도해봤다. 나도 별수 없었다.

#5. 콘티를 짜자, 콘.티.
영화제에 왔으면 영화를 봐야 한다. 그래서 영화를 보러 갔다. 고른 영화는 갈라 프레젠테이션 영화인 . 이란의 명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연출하고 이 영화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프랑스 여배우 쥘리에트 비노슈가 연기했다. 영화는 시작부터 진짜와 가짜에 대한 질문을 퍼부었다. 이어 이야기 역시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오가며 관객의 호흡을 빼앗아갔다. 영화를 보니 뭔가 조금 명확해졌다. 경계에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 는 확신이 생겼다. 만약 다른 영화를 봤다면 다른 확신이 생기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물론 “당연하지”.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넘나드는 핸드헬드 기법의 초단편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찍기로 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몰라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순간 ‘콘티’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영상의 밑그림이나 다름없는 콘티를 짜려고 친구의 스토리북에서 종이를 몇 장 뜯어냈다. 머릿속에 찍어야 할 장면들이 속속 그려졌다(사진③). 그런데 아뿔싸. 나는 지독하게도 그림을 못 그린다는 사실을, 그리다가 알았다. 초등학생만도 못한 그림 실력이 아니던가. 누구에게 보여주기는커녕 그린 나도 알아보기 힘들 만큼 엉성한 그림에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잠시 움찔했다.
문제는 또 있었다. 좀처럼 뻔뻔해지기가 힘들었다. 펜을 들고 일할 때는 길 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어보는 것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카메라를 들고 나니 어쩐지 수줍어졌다. 주변 기자 동료들이 “부산에서 뭐 쓸 거야?”라고 물어보면 “영화 찍으러 왔어”라는 당당한 대답 대신 “뭐 아무거나 쓰지, 뭐” 식의 애매한 대답만 흘러나왔다. 특히 얼굴이 알려진 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들이 전혀 나오지 않는 장면에서조차 카메라를 꺼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영화를 찍으려면 도대체 어느 선까지 양해를 구해야 하나, 난감했다. 길거리에서도 행여 누군가 카메라 쪽을 바라보면 황급히 카메라를 내렸다. 첫사랑을 만난 것도 아닌데 말이다.

#6. 그래서 영화가 뭐지?
“에라, 모르겠다” 지경에 이르자 영화에 대한 압박을 잊으려고 행사장을 찾기 시작했다. 무대인사부터 관객과의 대화, 기자회견, 영화관 등을 돌아다녔다. 밤이 되면 파티와 술자리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렇게라도 잠시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는지도. 그렇게 돌아다니던 어느 밤, 광안리에서 열리는 파티에 갔다. 그곳에는 올해로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 자리에서 떠나는 김동호 위원장과 배우 쥘리에트 비노슈,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있었다. 사람들이 그들을 둘러쌌다. 그날 오후 기자회견장에서 쥘리에트 비노슈가 김동호 위원장과 춤을 출 거라는 얘기를 꺼냈기에 사람들의 기대는 이미 커져 있었다. 잠시 뒤 댄스음악이 흘러나왔고 김동호 위원장과 쥘리에트 비노슈,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말 그대로 ‘막춤’을 췄다. 몸짓은 자유로웠고, 표정은 밝았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어쩌면 이 장면만으로도 영화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5년 동안 영화제를 지킨 노신사와 여배우, 그리고 우정 어린 막춤까지. 수많은 이야기를 가슴속에 감추고 그저 웃으며 춤을 추는 그들의 모습이 1분 넘게 이어져도 지루하지 않을뿐더러, 많은 생각을 하게 할 것 같았다. 카메라를 꺼내 그들이 춤추는 모습을 촬영했다(사진④). 오후에 찍어놓았던 기자회견 장면을 붙이면 어떨까? 이런, 얼굴이 너무 작다. 줌에 한계가 있는 DSLR 덕분에 기자회견장에 앉은 쥘리에트 비노슈의 얼굴이 콩알만 하다. 순간 들뜬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럼, 그렇지. 파티장을 나서며 피식 웃음이 났다. 설령 얼굴이 잘 나왔던들, 그게 영화가 될 수 있을까? 그건 몰카지 영화가 아니잖아. ‘주연 쥘리에트 비노슈’라는 자막을 떠올려보았다. 곧바로 자체 편집했다.
눈을 뜨니 아침, 이라기보다 점심이었다. 그 다음날도 눈을 뜨니 점심이었다. 전날 새벽 4, 5시까지 마신 술이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잊지 말아달라는 듯 용트림했다. 그렇게 영화 제작은 실패로 돌아갔다.

#7. 메이킹필름
영화 제작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기록만큼은 영상으로 남았다. 이 기사는 영화 제작 실패기이자 부산국제영화제 관람기이며 영상(절대 영화 아님) 한 편의 시나리오기도 하다는 점을 밝혀둔다. 짧은 영상은 얼마든지 공개할 생각이다. 민망하지만, 영화감독이나 영상제작자가 아니기 때문에 얼굴이 빨개질 만큼 부끄러워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영상은 홈페이지(h21.hani.co.kr)에서 볼 수 있다.
부산=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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