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도에 갔다. 출렁거리는 나무다리를 타고 갯벌을 지날 수 있는 곳이 있었다. 갯벌에 송송 뚫린 구멍 사이로 게들이 끝없이 들고 났다. 뭐가 그리 바쁘다고 집 안팎을 종종거리며 다니는 걸까. 쪼그리고 앉아 한참 들여다봤다. 가던 길 가자며 채근하는 옆 사람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어 일어나니, 다리가 저릿할 정도로 앉아 있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지루해 보일 법한 자연의 움직임은 묘하게 시선을 붙잡는 힘이 있다. 바닷가에 앉아 하늘과 바다를 변동 없이 일직선으로 나누고 있는 수평선을 바라보거나 잔디밭에 누워 비슷한 속도로 흘러가는 구름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본 경험이 있는지. 그런 것, 마음을 한자리에 붙박게 하는 힘, 자연에는 그런 힘이 있다.
기다려야 들을 수 있는 만선의 풍장 소리
여기 하염없이 갯벌을 말하는 남자가 있다. 해양문화학자 겸 사진작가인 김준이 글과 사진을 실은 (이후 펴냄)은 서해안을 중심으로 갯벌을 끼고 있는 바다와 그곳의 문화, 거기서 나는 먹을거리들을 살뜰하게 담은 책이다. 김준은 어촌을 연구한 논문으로 전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정도로 해양 문화에 관심이 많다. 1992년 처음 전남 완도군 소안도와 인연을 맺은 뒤, 섬과 바다와 갯벌을 셀 수 없이 드나들었다. 2000년부터는 일주일에 한 번꼴로 갯벌에 나갔으니, 지금까지 500번이 넘는 걸음을 했을 것이다. 갯벌에 대한 특별한 마음을 담아 이번 책에 앞서 등을 혼자 쓰고, 등을 다른 사람과 머리를 맞대고 썼다. 한 주제로 이토록 열심히 쓰는 까닭은 무엇일까. 파고 또 파도 먹을거리를 내놓고, 끔찍하게 오염돼도 끈질기게 정화되는 갯벌에는 사람을 끄는 힘이 있는 것 아닐까.
책은 수평선처럼 가로로 길다. 펼쳐진 책은 한 면 혹은 두 면을 통째로 써서 넓은 바다의 그림과 사진을 담는다. 그리고 그 사진에 갯벌에서 꼼지락거리는 생명을 담았다. 꼬막이 있고, 백합이 있고, 짱뚱어가 있고, 농게가 있다. 소뼈보다 뽀얀 국물을 낸다는 진도 미역이 있고, 하얗게 소금꽃을 피우는 재래 염전도 있다.
또한 책은 요즘 나오는 입체북도 사운드북도 아닌데, 희한하게 오감을 자극한다. 바닷바람에 미역을 널어 말리는 어촌 아낙의 ‘노동요’가 귓가에 환청처럼 머문다. 조개 캐는 손끝을 담은 사진은 바다 냄새를 코끝에 실어 보낸다. 싱싱한 꼬막, “쌀밥 같은 알을 밴 주꾸미” 등 갯벌에서 나는 먹을거리들이 맛깔 나게 묘사됐다. 2차원의 지면에 단어만 모아 차린 한상이 어쩜 이리 풍성할 수 있을까. ‘꼴깍’ 넘어가는 침을 삼키며 야밤 도심에서 해결할 수 없는 싱싱한 해산물에 대한 식욕이 돋을까 두려워 재빠르게 책장을 넘긴다.
갯벌은 조개와 짱뚱어만의 터전은 아니다. 바다에서 생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김준은 결코 인간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의 경험 한 자락은 갯벌과 거기에 기대 사는 생물-인간의 관계를 또렷하게 정리한다. 전북 부안군의 줄포만 갯벌에서 생태 공원으로 이어지는 작은 갯골에 놓인 그물 아래에 왜가리 한 마리가 목을 빼고 미동도 없이 물속을 응시하고 있다. 갯벌에 가서 족히 두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갯골로 다시 시선을 두니 그 곳은 시간 역시 미동이 없었다. 왜가리가 그 모습 그대로 같은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왜가리를 보고 김준은 생각한다. 다른 생명에게 무언가를 내어주는 때를 ‘기다려야 하는 곳’이 갯벌이라는 것. 그리고 그 기다림은 어떤 차등도 없이 누구에게나, 그러니까 왜가리에게나 농게에게나 인간에게나 똑같이 주어진다는 것. 갯벌은 주인 노릇 하려는 이기적인 인간을 무서워하지만 인간 또한 사실은 갯벌에 기대 사는 생물일 뿐이라는 것.
김준은 갯벌의 건강에 대한 염려도 덧댄다. “갯벌이 지금까지 건강하게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선조들도 왜가리처럼 기다릴 줄 알았기 때문이다. 돌을 쌓아 그물을 만들고 대나무로 살을 놓아 달이 가져오는 물고기를 기다렸다. 그래도 늘 만선을 해 풍장 소리가 선창을 흔들었다. … 갯벌을 망치는 가장 큰 적은 인간의 욕심과 조급증이다. 그물 폭은 길어지고, 그물 코는 작은 새우 한 마리 빠져나갈 수 없게 작아졌다. 그것도 부족해 첨단 장비로 무장하고 고기를 찾아다닌다.”
먹고 경험하고 사랑하라
책에는 갯벌 17곳이 담겨 있다. 10곳은 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곳이고, 나머지 7곳은 글쓴이가 특별히 아끼는 곳을 꼽았다. 그런데 10년이 넘도록 갯벌을 오가면서 어느 하나 책으로 엮고 싶지 않은 곳이 없었을 것이다. 7곳을 거르고 가른 기준은 이렇다. 어촌 문화가 잘 남아 있는 곳, 시민들의 힘으로 되살려낸 곳, 도심 속에서 어렵게 숨쉬고 있는 곳, 섬 문화가 잘 남아 있는 곳이다.
이 책을 보고도 갯벌에 매혹되지 않는다면, 혹은 글쓴이 김준이 왜 그토록 갯벌에 관한 책들을 계속 내놓는지 궁금하다면 짧은 가을이 끝나기 전 갯벌을 직접 찾아보자. 어떤 힘으로 생명을 길러내는지, 어떤 힘으로 그토록 한 사람의 마음을 빼앗았는지 사진으로 그 검고 평평한 모습만 봐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책 끝머리에 달린 가이드를 따라 갯벌을 체험해본다. 점차 낮 시간이 짧아지는 게 아쉬운 사람이면 전북 부안 모향 마을로 향한다.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늦게 지는 곳이다. 모세처럼 바다를 걸어서 건너보고 싶으면 경남 남해 문항 마을을 찾는다. 간조 때 ‘모세의 기적’을 볼 수 있다. 밤낮으로 부지런한 사람이면 바다에서 일출과 일몰을 모두 구경할 수 있는 무안 송계 마을을 찾아도 괜찮겠다. 무안에는 특히 낙지가 가을 제철을 맞아 맛이 좋다. 이도저도 아니면 쫄깃하고 고소한 낙지 맛만으로도 갯벌에 대한 애정이 돋아날 것이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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