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은 테스토스테론이 난무하는 공간이다. 2년간 주방 체험을 한 기자 빌 버포드의 묘사다. 테스토스테론은 남성호르몬이다. 셰프의 한마디에 주방의 전 요리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마초들의 공간이라는 뜻이다. 불과 칼이 순식간에 오고 가는 ‘핫 키친’은 그럴 만도 하다. 욕설도 성적 언어로 이뤄진다. 여기에 미국 요리사 앤서니 보댕의 체험을 덧붙여야 한다. 그는 에서 젊은 시절 주방에서 동료 여자 요리사와 선 채로 5분 만에 섹스를 나눴다고 썼다. 마초이즘에 섹스라니, 이거야말로 테스토스테론의 알파와 오메가가 아니냔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빌 버포드는 절반만 맞다. 지난 9월13일 새벽 1시30분에 그것을 깨달았다. 어머니에게 비전(秘傳)의 고추장아찌 조리법을 물은 게 9월1일이다. 청양고추에 간장을 붓고 일주일 뒤에 할 일은 간단했다. 냄비에서 간장을 따라내 다시 끓인 뒤 냄비에 다시 붓는다. 이게 전부였다. 항상 그렇듯 게으름과 지나친 낙관주의가 문제였다.
9월10일 아침, 비행기 좌석에서 안전벨트를 매다 문득 고추장아찌가 떠올랐다. 민주당 전당대회와 관련해 정치부 출장을 떠나는 날이었다. ‘아차, 8일에 간장을 다시 끓여 부었어야 하는데.’ 어차피 늦었다고 체념했다. 광주 출장에서는 맛난 전라도 음식 덕분에 집에 두고 온 고추장아찌를 까맣게 잊었다. 3일 동안 ‘진보’ ‘정통성’ ‘중도’ ‘심판’ 같은 추상어와 개념어에 나는 고추장아찌처럼 절여졌다. 추상의 바다에서 한 가닥씩 의미를 겨우 낚느라, ‘고추장아찌’ 같은 구체어를 떠올릴 정신이 내게 없었다.
언제 다시 고추장아찌 생각이 떠올랐을까? 9월12일 밤 부산에서 차를 몰고 올라와 서울 톨게이트에 다다라서였던 것 같다. 그때도 마음은 평온했다. 까짓거, 잘 익고 있겠지!
13일 새벽 헐레벌떡 차를 세우고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고추장아찌가 익어가던 냄비 뚜껑을 열고 매콤한 냄새에 미소지었다. 역시! 적당히 짭짤하고 적당히 매콤함 풍미. 젓가락으로 통통한 고추를 건지는 순간, 좁쌀 같은 게 꾸물거렸다…. 잘 익고 있었던 건 청양고추가 아니라 구더기였다.
빌 버포드는 틀렸다. 적어도 발효 음식에서, 주방은 테스토스테론이 아니라 에스트로겐(여성호르몬)이 넘치는- 넘쳐야할- 공간이다. 분초를 다투는 핫 키친은 테스토스테론이 넘칠지 모른다. 오랜 시간 숙성해야 하는 고추장아찌의 경우 ‘타이밍’이 중요하다. 분초를 다투지 않지만, 때를 넘기면 한순간 물거품이 되긴 마찬가지. 순간에 스테이크의 적절한 굽기를 판단하는 과감성과 용기보다, 일상 속에서도 장아찌의 간장을 언제 다시 끓여야 하는지 기억하는 섬세하고 꼼꼼한 기억의 힘이 중요했다. 발효 음식이 유독 기억을 환기시키는 건 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자연발생설을 신봉하게 된 것은 덤.)
고나무 기자 한겨레 정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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