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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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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유산’ 할머니의 손맛

뚱뚱이 할머니, 마복림 할머니, 원할머니가 이룬 오래된 가게들의 세 가지 길…
도와주고 물려주고 새롭게 북돋고
등록 2010-09-15 15:23 수정 2020-05-03 04:26
평양 할머니 식당, 욕쟁이 할매 보신탕, 할매 손칼국수, 강원도 할머니 족발… 그 외 무수한 할머니 식당들. 해방 뒤 할머니의 손끝에서 ‘식당’의 새로운 역사가 쓰여졌다. 할머니 얼굴이나 이름이 간판에 새겨진 세 집을 들렀다. 한 분은 살아서 식당 일을 여전히 돕고 있고, 한 분은 노환으로 식당으로의 외출이 힘들다. 한 분은 돌아가셨지만 전국 방방곡곡으로 그 맛이 멀리 퍼져나간다. 세 할머니의 ‘위대한 유산’을 돌아보았다. 편집자
서울 장충동 뚱뚱이 할머니 족발. 사진 한겨레 류우종 기자

서울 장충동 뚱뚱이 할머니 족발. 사진 한겨레 류우종 기자

오후 3시 따가운 햇살이 한창이고 골목에서는 고추 따기가 한창이다. 오늘 강원 양양에서 110근의 빨간 고추가 올라왔다. 포대에 담긴 고추가 골목에 늘어서 있다. 점심때가 훨씬 지났지만 맥주를 앞에 둔 청년들, 소주를 앞에 둔 중년들이 나가면 데이트족, 가족으로 보이는 4명 등이 ‘뚱뚱이 할머니 족발’ 가게에 들어온다. ‘뚱뚱이 할머니’는 가게 안팎으로 오가며 바쁘다. 가게 밖으로 나가 꼭지 딴 고추를 모아 저기 볕 쪽으로 세우란다. 차를 어디다 주차해야 되는지 묻는 사람의 말에 답하는 것도 할머니다. “저기 가게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셔서….” 다시 들어와 카운터에 앉으니 할아버지·할머니 한 무리가 들어온다. “여기 할머니가 이렇게 많아, 여기 찾느라 힘드네. 할머니 보러 왔어”라고 말하며 자리에 앉는다.

식당에서도 통한 수완과 아이디어

‘뚱뚱이’ 전숙열(82) 할머니는 오전 10시에 나와서 오후 5시까지 카운터를 지킨다. 카운터는 돈의 출입을 지키는 자리일 뿐 아니라 가게 안 전체를 조망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턱을 높인 자리에 앉아서 식탁에 김치가 빈 것을 일러주고 손님 부르는 데 바로 답해서 주문을 받아 넘긴다.

1957년 꽃밭이던 자리에 ‘하꼬방’으로 차린 가게였다. 지금은 서울 장충동 신세계건설 빌딩이 있는 자리다. 코딱지만 한 가게에 비좁게 탁자 4개를 뒀다. 가게 이름은 ‘함경도집’이라 했다. 빈대떡과 만두를 팔았는데 손님들이 술안주를 찾았다. 어린 시절 만주 살 적에 평안도 출신 어머니가 입에 넣어주시던 보드라운 족발이 생각났다. 식은 다음에도 쫀득쫀득하던 게 별미였다. 남대문시장에 가서 돼지 족발을 떼왔다. “장사를 하려면 머리를 써야지. 물 붓고 삶으니 좀 심심해. 간장을 한 사발 내다가 부었어. 간이 배니까 맛있어. 그 국물을 버리지 않고 삶으니, 삶을수록 맛있어져.”

할머니는 6·25 전쟁 때 피난 간 부산에서 옷장사를 하면서 돈을 처음 만졌다. “웃옷을 4천원에 사서 8천원에 팔고, 즈봉(바지)을 8천원에 사다가 2천원을 남겼지. 그것도 장사 나간 처음에는 3일 동안 하나도 못 팔았어. 아무것도 못 파니 마음이 답답해 집에를 못 들어가. 나흘째에 하나 팔고는 집에 들어가 밥을 먹었지.” 장사가 끼니보다 우선이었다. 돈이 있으니 자신감도 붙었다. 서울에 올라온 뒤에도 장사를 계속했다. “마음이 순하고 좋아서 어떻게 경찰을 했는지 모르겠는” 남편 대신이었다. 미군 물건을 받아 팔았다. “물건 위에 배추를 얹었는데도 형사가 따라붙어. 그런데 제일 안전한 곳이 어딘지 알아. 시경 지하야. 거기서 장사를 하는 줄 누가 알겠어?” 장사가 잘됐다. 동업한 3명이 1천원짜리를 쌓으면 머리에 닿을 정도(할머니는 의자에 앉은 채로 손을 머리 높이에 갖다 댔다)로 벌었다.

“근데 쉽게 들어온 돈은 쉽게 나가더라고.” 은행에도 안 넣고 쌓아놓은 돈이었으나 남에게 빌려주고 나니 남의 돈이 되었다.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차린 것이 식당이었다. 옷장사를 할 때의 아이디어와 수완은 식당에서도 통했다. 돼지족을 보들보들 북쪽 식으로 삶은 것도 별미였지만, 곁들이는 것으로도 맛을 돋웠다. 녹두를 갈아 지져 녹두전을 같이 냈다. “지금은 녹두 한 가마에 50만원씩 해. 쌀 적에 서비스하기 시작했는데 비싸다고 안 할 순 없잖아.” 할머니집에는 보물창고가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도 많이 찍어갔어. 동굴이 있는 집은 대한민국에 이곳 하나일 거야. 전쟁 때 방공호로 썼던 걸 거야.” 이곳에다 된장과 고추장, 새우젓 단지를 넣는다. 3~4년 쓸 분량의 단지가 채워져 있다. 묵은 것부터 차례대로 내어 쓴다. 고추는 강원 양양에서 올라오고 새우젓은 인천 조카가 하는 배에서 넘겨받는다.

‘뚱뚱이 할머니 족발’에서는 53년 된 국물에 삶은 족발을 새우젓, 녹두전과 함께 낸다. 전숙열 할머니(원 안)는 82살의 연세에도 카운터를 지키는 현역이다(왼쪽). 90살이 된 마복림 할머니는 떡볶이 가게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 아들과 며느리가 가게를 꾸리고 있다. 오전 7시부터 3시까지는 둘째며느리 김선자씨(원 안)가 가게를 본다.사진 한겨레 류우종,구둘래 기자

‘뚱뚱이 할머니 족발’에서는 53년 된 국물에 삶은 족발을 새우젓, 녹두전과 함께 낸다. 전숙열 할머니(원 안)는 82살의 연세에도 카운터를 지키는 현역이다(왼쪽). 90살이 된 마복림 할머니는 떡볶이 가게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 아들과 며느리가 가게를 꾸리고 있다. 오전 7시부터 3시까지는 둘째며느리 김선자씨(원 안)가 가게를 본다.사진 한겨레 류우종,구둘래 기자

함경도집은 아줌마 족발, 할머니 족발이 되고

가게를 차린 지 얼마 안 돼 족발 냄새를 맡고 곧 사람들이 줄을 섰다. 1년6개월이 지나자 바로 붙어 족발 가게가 하나 들어섰다. 1970~80년대를 지나면서 족발집들이 늘어섰다. “골목마다 족발집이 들어서더라고. 많을 때는 열네 집, 열다섯 집 되었지.” 그때부터 장충동 하면 ‘족발’이 되었다. ‘함경도집’을 평안도 출신에게 넘겨주고 가게를 지어 나왔다. 간판은 사람들이 별명으로 부르던 ‘뚱뚱이 아줌마 족발’로 바꿔 달았고, 환갑이 넘으면서는(1980년대 말) ‘뚱뚱이 할머니 족발’로 바뀌었다. 근처 가게들도 모두 할머니처럼 나이를 먹었다. ‘원조 1호 장충동 할머니집’ ‘강원 할머니 족발’ ‘원조 평북 할머니집’ ‘한양 할머니 족발’ 등 ‘할머니’를 달고 있다.

솥이 놓인 자리가 바뀌고 젊은 새댁은 나이가 들었다. 국물은 세월을 먹고 진해진다. 부엌에는 53년을 이어온 국물이 족발을 품고 있다. 두 개 걸린 솥 중 한 솥에는 담가놓고, 다른 한 솥에서는 끓이고 있다. 한 솥에 30개씩 넣지만 가득 넣을 때는 40개씩도 들어간다. 그것을 하루에 6번씩 삶는다. 토요일과 일요일 손님이 많을 때는 일고여덟 번을 삶는다.

53년 된 국물이 뚱뚱이 할머니의 족발이 다른 데보다 풍미가 풍부한 비결이겠지만, 그때마다의 요령도 있다. 작은 족발은 쓰지 않는다. “작은 건 삶는 시간이 짧아져 맛이 없어.” 오래된 손이고 큰손이다. 슬쩍 흘리는 비결도 있다. “생강, 대파, 양파(뜸을 들이고 더 이상 이야기 하지 않음)를 고아넣어. 그런데 마늘은 넣지 않아. 마늘을 넣으면 누린내가 나.”

10여 년 전부터 천천히 국물까지 다 넘겨주고 할머니는 ‘카운터 보는 사람’이 됐다. “내 몸을 위해서 하는 거야. 무엇이라도 해야 머리가 맑지. 가만히 있으면 치매 생겨.” 딸 둘에, 아들 셋 다섯 명을 뒀는데 ‘논다대학’ 아들들 대신 며느리가 식당을 지킨다. 첫째며느리가 주방을 맡고, 둘째며느리는 할머니가 ‘퇴근’하는 오후 5시에 가게로 나온다.

음식은 어깨너머로 배운 가닥이 있을 뿐 정식으로 어머니에게서 전수받지는 못했다. 어머니는 만주에서 시집 식구를 따라 서울로 왔던 1948년 북한으로 들어가셨다. 그 뒤로는 소식이 끊겼다. 어머니가 먹여준 보드랍던 족발은, 그 기억만으로 남아 할머니의 손끝에서 재탄생했다. 그리고 50년간 한국인의 별미가 되었다.

근대에 음식점이 생겨났지만 보통 한국인의 식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상차림을 제대로 갖춰낼 만한 곳은 출세한 관료나 낭만파 우국지사들이 드나들던 ‘관’이란 이름의 요정이 주도했다.”(김순경, , 크레디에디트 펴냄)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한국은 음식문화에서 대대적인 변화를 겪는다. “난민들이 풀어놓은 팔도 음식과 참전국들의 외래 음식이 함께 뒤섞여지며 우리의 음식문화는 큰 변화의 시기를 맞게 된다. …음식을 파는 것은 귀천을 따지기 전 가장 빠른 부의 축적 방법이었고… 탕반과 국숫집은 길가로 나앉아 대중 음식점으로 산업화했다.”(같은 책) 해방 이후 빠르게 달려가는 세상은 부엌의 손을 거리로 내놓았다. 식당 일은 가장 먼저 여자의 ‘직업’이 됐다. 이때 거리로 나앉은 이 손들의 역사가 이제 50~60년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 손맛은 뚱뚱이 할머니가 간판에 바꿔 써온 ‘함경도집’ ‘아줌마’ ‘할머니’처럼 명칭이 달라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함경도댁의 손맛, 어머니의 손맛, 할머니의 손맛이 되어갔다.

이제 며느리도 알아요

‘음식의 새로운 문화’를 주도한 것도 지금은 할머니가 된 ‘여자’의 손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장맛의 비결로 사람들의 애를 태웠던 할머니가 있다. “며느리도 몰라, 누구도 몰라”라는 고추장 광고의 주인공 마복림 할머니다. 그 고추장 광고가 나온 게 1996년이다. 마복림 할머니 얼굴이 크게 걸린 서울 신당동 떡볶이 골목의 간판에는 “이제 며느리도 알아요”라고 적혀 있다. 15년 사이의 변화다. 변화는 또 있다. 마복림 할머니는 가게에 나오지 않는다. “이제 연세가 90에 이른 할머니는 노환으로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라고 둘째며느리 김선자(57)씨는 전한다.

마복림 할머니는 1953년 동아극장 앞에서 떡볶이를 팔았다. 옥수수와 감자를 한켠에서 찌고, 떡볶이를 고추장에 버무려 파는 식이었다. 그 뒤 지금 자리에 떡볶이 가게를 낸 할머니는 ‘떡볶기 혁명’을 일으킨다. 접시에 담아주는 떡볶이에서 끓여먹는 떡볶이로의 변화였다. ‘즉석 떡볶이’다.

1976년 시집와서 그 변화를 직접 목격한 김선자씨는 말한다. “연탄으로 하다가 자리마다 가스를 놓는 식으로 바꿨지. 가스를 놓으니까 연기도 안 나고 편하고 좋더라고요.” 이런 떡볶이 먹는 방식의 변화는 ‘트렌드’가 되면서 젊은이들이 몰려왔다. 그에 따라 떡볶이 집도 여럿 생겨났다. 당시는 고교야구의 전성기로 동대문운동장에서 쏟아져나온 청소년들이 그 열기를 풀어놓은 곳도 떡볶기집이었다. 마복림 할머니 가게는 하지 않았지만, 다른 떡볶이집에는 호객을 위해서 DJ 부스를 두었다. 당시의 풍경을 들려주는 것이 DJ DOC의 이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 떡볶이를 너무 좋아해. 찾아간 곳은 찾아간 곳은 신당동 떡볶이집. 떡볶기 한 접시에 라면 쫄면 사리 하나 없는 돈에 시켜봤지만 그녀는 좋아하는 떡볶기는 제쳐두고 쳐다본 것은 쳐다본 것은 뮤직박스 안에 DJ라네. 무스에 앞가르마 도끼빗 뒤에 꽂은 신당동 허리케인 박.”

할머니의 가업은 자손에게로 이어졌다. 고추장을 만드는 것은 아들들의 몫이다. 집에서 만들어 식당으로 갖고 나온다. 식당 일은 며느리들이 본다. 며느리 김선자씨가 가게 일을 본 것도 시집온 그날부터이니, 이제 34년을 헤아린다. “시집올 때 음식점을 한다기에 각오는 했지만, 힘든 것은 상상을 넘”는 시간이었다. 작았으나 항상 붐비는 가게에서, 며느리들이 다 동원돼 일했다. 세월은 떡볶이를 ‘젊은이의 간식’에서 8살부터 80살까지의 ‘옛맛이 그리운 식사’로 승격시켰다. 주차장을 마련해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신당동 떡볶이 골목의 가게들에는 여전히 점심시간이면 사람들로 붐빈다.

마복림 할머니가 강조한 ‘비밀’은 이제 아들과 며느리만 아는 게 아니게 됐다. 그가 만들어낸 ‘시커먼 고추장=고추장+자장’은 이제 모든 즉석 떡볶이집의 공식이다. 그 ‘황금 비율’도 뚝딱 인터넷을 검색하면 나온다. ‘고추장:자장=15:1’이라고 한다.

원할머니 김보배 할머니는 지난해 돌아가셨다. 그가 서울 황학동에서 하던 보쌈집(사진)은 재개발로 사라졌지만, 조금 떨어진 자리의 ‘원할머니 본가’는 지금도 영업 중이다. 아래는 현재 원할머니보쌈에서 사용하는 기업 로고.사진 원앤원 제공

원할머니 김보배 할머니는 지난해 돌아가셨다. 그가 서울 황학동에서 하던 보쌈집(사진)은 재개발로 사라졌지만, 조금 떨어진 자리의 ‘원할머니 본가’는 지금도 영업 중이다. 아래는 현재 원할머니보쌈에서 사용하는 기업 로고.사진 원앤원 제공

할머니는 떠나도 맛은 남는 비결

가게를 성공시킨 할머니의 맛 비결은 ‘계량’이다. 일일이 맛을 보며 음식을 낼 수는 없는 법이다. 할머니는 가도 맛은 남는 비결은 ‘표준화’다. 나이 들수록 미각이 퇴화하는 어르신이 똑같은 맛을 내는 것은 정확한 ‘손대중’이다. 그것이 ‘손맛’이다. 할머니의 손맛은 ‘프랜차이즈’라는 이름으로 표준화·계량화되기도 한다.

1975년 서울 청계천 5가 황학동의 간판도 이름도 없던 보쌈집, 저녁 시간이면 사람들이 두 줄로 가게를 휘감는 명물이었다. 여러 음식을 했지만 보쌈 맛으로 소문이 나서 얼마 뒤부터는 보쌈만 팔았다. 사람이 앉으면 주문 없이 보쌈을 내놓았다. 사람들은 ‘할머니 보쌈집’이라고 불렀는데, 원조 할머니 보쌈집이라는 의미로 ‘원할머니보쌈’이라고 상호를 정해 간판을 올렸다.

그러니 원할머니는 원씨가 아니다. ‘원할머니보쌈’의 창업주 김보배 할머니의 솜씨는 사위인 박찬희씨에게서 프랜차이즈화됐다. 박찬희씨는 1984년 힘들다며 가게를 접겠다는 할머니에게 가게를 물려받았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서다. 박찬희씨는 프랜차이즈를 낼 생각 없냐며 찾아오는 여럿을 내치다가 결국 수도권에 점포를 내기로 했다. 1991년 원유통(이후 원앤원주식회사로 바꿈)을 설립하고 경기 안산 상록점이 처음 생겼다.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가맹 문의가 부쩍 늘었고, 현재는 전국에 290곳을 헤아리게 됐다.

할머니의 손맛은 프랜차이즈화하면서 바뀌었다. 고기는 고급화됐다. 할머니가 주로 쓰던 돼지 앞다리에 삼겹살·사태·등심을 더해 내놓았다. 바로바로 삶아서 내는 방법으로는 흔한 돼지 앞다리도 맛있었지만 큰 식당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김치 이파리를 하나하나 따서 속을 채워넣는 할머니의 김치는 2004년 ‘양파형 개량 보쌈 김치와 그 제조 방법’으로 특허 등록됐다. 겉절이 형태로 매일 담그던 김치는 ‘김치숙성 지연기술’을 통해 프랜차이즈에서도 비슷한 맛으로 맛볼 수 있게 됐다.

김 할머니는 지난해 봄 돌아가셨다. 원앤원푸드의 할머니 얼굴은 두 번 바뀌었다. 정겨워 보이던 얼굴은 인자한 얼굴이 되었다. 할머니를 닮았느냐고 물으니 그렇지는 않다고 한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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