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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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씹어먹자, 잘근잘근

잘 씹으면 무병하다… 지천에 채소가 널린 여름, 생명을 느끼면서 단물이 나도록
등록 2010-07-29 15:03 수정 2020-05-03 04:26
잘 씹으면 무병하다… 지천에 채소가 널린 여름, 생명을 느끼면서 단물이 나도록.

잘 씹으면 무병하다… 지천에 채소가 널린 여름, 생명을 느끼면서 단물이 나도록.

<font color="#017918"> “짙거나 살찌거나 맵거나 단 것은 참다운 맛이 아니다. 참다운 맛은 오직 담담할 뿐, 영절스럽거나 우뚝하거나 아주 다른 것은 지인(至人)이 아니다. 지인은 다만 평범할 뿐.”( 전 7)</font>

‘채근’을 국어사전은 ‘먹을 수 있는 채소의 뿌리’라고 말하고 있다. ‘맛없고 거칠고 보잘것없는 음식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이라는 이름을 단 홍자성의 책이 있으니 전집 225장, 후집 134장으로 돼 있다. 조지훈은 을 번역하고, 글을 자연의 섭리, 도의 마음, 수신과 성찰, 세상 사는 법도로 나누어 편집했다. 지훈은 수삭을 병들어 누워 있으며 정신을 가다듬어 책을 번역한 까닭을 “중속과 더불어 화락하되 그 더러움에는 물들지 않고 고아의 경지에 뜻을 두어도 고절의 생각에 빠지지 않게 하”니 현대인에게 권할 만하기 때문이라 했다.

‘채근’은 송나라 학자 왕신민이 “사람이 항상 나물 뿌리(채근)를 씹어 먹을 수 있다면, 모든 일을 가히 이루리라”고 에서 말한 데서 왔다.

은 지인으로 가는 길을 ‘채근 씹기’에 비유했으나, 이 글에서는 ‘채근 씹기’만을 살핀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될 터나, 주자는 왕신민의 말에 주를 달아 “지금 세상 사람들을 보매, 채근을 씹을 줄 모름으로 말미암아, 자기 마음을 어지르는 이들이 많기에 이르렀으니, 가히 경계하지 않을 수 있으랴”고 했으니 그 방법이 또한 달이 되겠다.

<font color="#00847C"> ① 씹기</font>
잘 씹으면 무병하다… 지천에 채소가 널린 여름, 생명을 느끼면서 단물이 나도록.

잘 씹으면 무병하다… 지천에 채소가 널린 여름, 생명을 느끼면서 단물이 나도록.

<font color="#017918"> “유장한 맛은 부귀에선 못 얻나니 콩을 씹고 물 마시는 데서 얻는도다. 그리운 회포는 고적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요, 젓대를 만지고 거문고 줄이라도 고르는 가운데서 생기나니 진실로 아올 것이 짙은 맛은 항상 짧으며 담박한 취미만이 홀로 참다움을.”( 후 34)</font>

어찌 씹는가. 주자의 시대에도 그랬다 하니 별 새로운 사실은 아니겠으나, 채근의 씹는 법은 잊혀지고 있다. 지훈의 “채근의 담박한 맛이 씹을수록 달듯이 의 맛 또한 읽을수록 향기롭”다는 말에서 유추해본다. 채근은 여러 번 씹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단맛이 우러나는 것이다. 꿀떡꿀떡 넘기는 대신 잘근잘근 씹어야 한다. 어찌 씹느냐에 ‘여러 번’이라는 말이 다이니 어렵지 않으나, 매 숟가락마다 습관으로 해야 하니 어렵다.

예전 음식은 한끼에 6천 번을 씹었는데, 최근에는 200번밖에 씹지 않는다고 한다. 부드러운 음식이 늘어난 탓이다. 최근 한 정신과 전문의는 “씹을 게 없으면 껌이라도 씹으라”며 씹기를 강조했다. 한 번 수저를 들어 30번을 씹어 넘기고 그렇게 천천히 30분을 식사하라는 ‘30·30 식사법’도 나왔다. 이빨 수만큼 씹으라는 말도 있다.

사찰음식을 만드는 선재 스님은 물이 될 때까지 씹으라고 한다. “이가 좋은 사람은 덜 씹고, 이가 안 좋은 사람은 여러 번 씹어야지요. 곤죽이 된 뒤에도 두 번을 더 돌려 씹습니다. 덜 씹으면 위장에서 흡수가 잘되지 않지요. 침하고 섞여서 물이 될 때까지 만들어 내려보내면 위탈이 없습니다.”

잘 씹으면 무병하다는 불가의 가르침은 현대적이다. 침에는 소화효소뿐만 아니라 면역물질도 포함돼 있어 많이 씹으면 몸의 면역력이 강해진다.

불교에서는 요리법에서 세 가지 덕을 말한다. 경연, 정결, 여법작이다. 이 가운데 경연은 섬유질이 많아 단단한 음식을 어떻게 입에 맞도록 만드느냐를 뜻한다. 옛사람들이 단단한 음식이야말로 몸에 좋다고 여긴 때문이다. 나머지 정결은 깨끗한 것이요, 여법작은 법답게 만드는 것이다.

<font color="#C21A8D"> ② 뿌리와 껍질 그리고 씨앗 씹기</font>
씹어먹자, 잘근잘근

씹어먹자, 잘근잘근

<font color="#017918"> “‘명아주 먹는 입, 비름 먹는 창자’에는 얼음같이 맑고 구슬처럼 조촐한 사람이 많지만, ‘비단 옷 입고 쌀밥 먹는 사람’은 종 노릇 시늉도 달게 여긴다. 대저 뜻은 담박함으로써 밝아지고 절조는 기름지고 달콤한 맛 때문에 잃어지는 까닭이다.”( 전 11)</font>

알만 쏙 빼서 만든 재료로 만든 요리는 입속에 들어간 즉시 물컹거리니 씹을 게 없다. 그냥 위에만 퍼붓는 음식이 넘쳐난다. 더울 때 먹는 아이스크림이 그러하고 단맛을 뭉쳐놓은 초콜릿이 그러하다. 소화를 돕는다는 요구르트도 그냥 목구멍으로 넘기면 그만이요, 바쁜 아침 출근길을 돕는 효소물이나 녹즙도 훌훌 넘어간다. 고기는 씹어야 맛이라지만 입안에서 씹을 필요도 없이 녹는 부드러운 부위를 상급으로 친다.

오래 씹으려면 단단한 것을 먹어야 한다. 씹는 것이 채근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채근은 토란, 우엉, 감자, 도라지, 연근 등의 뿌리채소다.

뿌리를 먹는 채소만이 아니라 뿌리를 먹지 않는 채소에서도 단단한 것이 중요하다. 선재 스님은 부드러운 상추보다도 상추종을 윗길로 친다. 상추종은 상추잎과 뿌리 사이의 대다. “상추종은 상추대공인데, 이를 재료로 하여 만드는 게 상추불뚝김치, 상추불뚝전입니다. 기운이 불뚝 솟는다고 해서 그렇게 말합니다.”

씹기 좋기로는 껍질과 씨앗도 있다. 자연요리 전문가 문성희는 “껍질과 씨앗, 뿌리를 버리지 않고 먹어 먹을거리를 제공한 자연에 감사를 표하고 생명 에너지를 활성화한다”는 것을 밥상의 원칙으로 삼는다. 그 밖의 원칙으로는 채식, 가공식품 먹지 않기, 손수 재배한 재료 먹기, 조리 가공을 적게 하기 등이 있다. “껍질엔 섬유질뿐만 아니라 생명을 보호하는 힘이 있고, 씨앗은 그 자체가 생명력의 원천이며, 뿌리에는 생명을 성장하게 하는 힘이 있다.”()

사찰음식 역시 전체식이다. 하나도 버리지 않고 먹는 것이다. “음식을 낭비하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의미는 식품의 영양소를 빠짐없이 섭취하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쌀은 도정하지 않은 현미를 먹고, 과일도 가능하면 껍질째 먹기를 권합니다. 표고버섯 불린 물로는 찌개를 끓이고, 나물 데친 물도 버리지 않고 국을 끓여 먹거나, 물김치를 만들어 먹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쌀뜨물을 버리지 않고 된장국에 이용하는 게 특이하지 않다. 선재 스님은 미역 불린 물을 버리지 않는다. 새알심을 만들 때 이 물에 반죽한다. 수박의 하얀 껍질로 만드는 수박껍질무침도 있다. 하얀 속껍질만 벗겨 채 썰어 소금에 절인다. 선재 스님은 자주 “버리지 않으면 먹을 궁리가 생긴다”는 말을 한다.

뿌리는 약이 된다. 요리연구가 산당 임지호는 평상시 파 뿌리를 쟁여두고 필요할 때 꺼내 쓴다. 파 뿌리는 초기 감기에 특효고 열이 오르거나 체했을 때도 좋다. 허리 아픈 데는 파 뿌리 파스를 만들어 찜질한다. 동치미 항아리에 파 뿌리를 넣어두면 향기가 은은해진다. 토란 껍질은 어깨 통증이 심할 때 밀가루와 반죽해 파스로 이용한다.

통째 먹으려면 짠지가 좋다. 무의 실털도 그대로 둔 채 소금물에 담가 무짠지를 만들거나, 끓인 물에 오이를 담갔다가 바로 건져 오이짠지를 만든다. 이렇게 통째로 “수많은 생명의 손길을 느끼면서 먹게 된다”(선재 스님).

<font color="#008ABD"> ③ 여름에 단단하게 먹기</font>
씹어먹자, 잘근잘근

씹어먹자, 잘근잘근

<font color="#017918"> “입에 맛있는 음식은 모두 다 창자를 짓물게 하고 뼈를 썩게 하는 나쁜 약이다. 실컷 먹지 말고 오분쯤에 멈추면 재앙이 없으리라. 마음에 쾌한 일은 모두 다 몸을 망치고 덕을 잃게 하는 중매니라. 너무 탐닉하지 말고 오분쯤에 멈추면 뉘우침이 없으리라.”( 전 104)</font>

여름은 식물이 그 영양분을 잎으로 다 가져가는 때다. 이런 때 제철 잎채소는 불공평하게 훌륭하다. 싱싱한 것이 지천이다. 더운 여름날이라 불을 가까이 하기 힘든 때 희한하게도 생식으로 가장 풍성해지는 때다. 조미료 없이도 맛이 난다. 여름은 재료만으로도 충분하다.

요리연구가 홍신애는 “여름철에는 재료가 맛있는 게 많은데, 천천히 먹다 보면 그 진짜 맛을 접하게 되고, 그 버릇이 1년을 나게 한다”고 말한다. 여름에 단순하게 먹으면서 건강하게 지내면, 다른 계절의 복합적인 맛도 단순소박하게 즐기게 된다.

여름 가지나 호박은 30초쯤 짧게 볶아주어 반생이어도 먹을 만하다. 생으로 씹다 보면 단단한 것이 풀어져 제 살을 드러낸다. 먹다가 생겨나는 단맛은 다 같은 단맛이 아니다. 애호박은 여운이 있는 단맛이고, 가지의 단맛은 쌉싸래하다. 상추의 단맛은 강하게 뒷맛이 있고 살구와 복숭아에는 새콤한 맛이 섞여든다. 마트의 냉장실이 아니라 시장통의 채소를 고르는 게 여름 장보기의 비결이기도 하다. 단단한 채소는 더운 햇볕에 무르지 않는다.

여름, 보잘것없는 지천의 채소를 단맛이 우러나도록 씹어보라. 가장 풍성한 밥상으로 살아나리라.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E7E7E2"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7F6F4"><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

<font color="#638F03">여름 입맛 돋우는 보리밥과 푸성귀</font>
<font size="3"><font color="#991900">깔깔하게 씹어 삼켜라</font></font>

여름 입맛 돋우는 보리밥

여름 입맛 돋우는 보리밥


‘채근’이라는 ‘볼품없는 식사’는 거친 식사, ‘조식’(粗食)이다. 화려하지 않은 일상식을 말한다. ‘초근목피와 같은 조식’은 밥·된장국·나물이다. 이렇게 단순한 일상식이 여름의 입맛을 돋아낸다. 여름 입안이 깔깔할 때 깔깔하게 씹어 건강을 챙긴다. 선재 스님은 미끈미끈한 음식과 찬 바람(에어컨)이 중풍을 불러온다고 말한다.
먼저 밥이다. 쌀만으로 짓지 않는다. 쌀은 여름을 견딘 열매라 열량이 많고 체열의 발산을 막는다. 따라서 추울 때 적당한 음식이다. 이와 반대로 추운 철을 견디고 여름에 수확하는 보리는 여름에 적당하다. 그러니 여름 밥에 꼭 들어갈 것이 보리다. 강낭콩·완두콩 등 여름에 풍성해지는 콩류도 좋다. 이리저리 합쳐 다섯 가지 곡류로 밥을 지으라고 선재 스님은 말한다.
여름 김치를, 보리에다 감자와 밀가루를 함께 섞은 국물에 담그면 더위를 식히는 음식이 된다. 가지·오이·열무에 소금을 넣어 숨을 죽인 뒤 세 가지를 섞은 국물에 담근다. 김치를 담글 때 계핏잎을 훑어 넣어주면 냉기를 씻어준다. 여름 채소가 가진 해충도 자연스럽게 제거해준다.
배탈이 나거나 소화가 안 되면 비름나물을 먹는다. 비름나물은 오행초라고 불리는데 음양오행설의 목·화·토·금·수 다섯 가지 기운을 지닌다. 비름나물을 푹 고면 이명래 고약 재료가 된다. 된장·고추장·간장 어디든 좋을 대로 무쳐 먹는다.
푸성귀를 깨끗이 씻어 밥상에 올리는 것으로 나물을 삼는다. 쌈에 넣는 강된장에 감자를 갈아 넣으면 맛이 부드러워진다. 찜통에 호박잎, 우엉잎, 양배춧잎을 쪄내 강된장을 얹어 먹으면 잃었던 입맛이 돌아온다.
여름에 난 탈을 달래는 것으로 죽이 있다. 단 희멀겋게 씹어 넘길 것 없이 끓이지 않는다. 요리연구가 김성희는 불린 쌀을 믹서로 갈지 않고 절구로 빻은 것으로 죽을 쑨다. 믹서로 돌리면 죽의 차진 느낌이 사라지고 탄력도 없어진다. 절구로 빻으면 질감이 불규칙해져서 씹는 느낌이 특별해진다.
</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글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font color="#006699">참고 문헌
(선재·디자인하우스), (문성희·샨티), (임지호·샘터)</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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