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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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슴슴한 한 그릇, 국수 먹는 밤 깊어가길

대를 이어 옛 맛을 잇는 원조 국숫집 유람 후기
시절과 재료에 따라 변화하는 맛, 향토성 지켜낼 필요 있어
등록 2010-06-10 16:27 수정 2020-05-03 04:26
충북 옥천 생선국수는 육수를 먹기 위해 국수를 말아 먹는 음식이다. 6~7시간씩 끓이는 육수엔 그만큼 정성이 필요하다.

충북 옥천 생선국수는 육수를 먹기 위해 국수를 말아 먹는 음식이다. 6~7시간씩 끓이는 육수엔 그만큼 정성이 필요하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담백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얼음이 동동 떠 있는 동치미에 곁들여 먹는 슴슴한 국수 한 그릇/ 군불을 때서 아랫목은 쩔쩔 끓어오르고 창호문 밖에선 하얀 눈이 펑펑 내릴 것이다/ 옹기종기 가족이 모여 국수를 먹는 밤이 깊어간다.”

맛을 ‘흉내’내기만 하는 외국산 재료

시인 백석의 시 ‘국수’를 읽는다. 전국 방방곡곡의 맛있는 국수를 먹고 와 읽으니 글에서도 맛이 난다. 지역별 향토 국수의 맛과 역사를 취재하기 위해 ‘원조’라고 알려진 전국의 국숫집을 7일간 찾아다녔다. 국수를 반죽하고 뽑느라 허리가 휘어진 할머니들과 대를 이어 옛 맛을 살리는 자손들을 만났다. 그중 가장 오래된 국숫집이 62년간 생선국수를 팔아온 충북 옥천의 선광집이었다. 식당에서 맛볼 수 있는 향토 국수집의 역사가 채 100년이 되지 않는다.

그나마 향토 국수를 지켜내는 국숫집도 대물림되면서 맛이 변하고 있다. 진주냉면 2대 전수자인 정운서씨는 “옛 맛만 고수해서는 노인들 외에 젊은 사람이 찾지 않는다”고 했다. 지역민이 즐겨 먹던 국수는 이제 외지인이 아니면 찾는 이 없는 별식이 됐다. “냉면 맛이 변했다”고 투덜거리는 지역 노인들보다 인터넷 맛집 정보를 보고 찾아오는 외지 젊은이들의 입맛이 중요해졌다. 젊은 취향에 맞추다 보니 면은 더 쫄깃해지고, 육수는 시고 달큼해질 수밖에 없다. 다른 지역 원조 국숫집이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다. 후대는 어디까지나 선대의 맛을 흉내내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

전통의 맛 재현을 방해하는 건 달라진 재료도 한몫한다. 각 지역에서 흔한 재료로 만들어 먹던 게 국수인데, 자연환경이 변하면서 전통 국수의 맥도 끊기고 있다. 경북 안동에선 낙동강에 댐이 생기면서 은어가 잡히지 않아 은어 육수를 낸 건진국수를 더 이상 먹지 못한다. 시화호가 생겨 유속 변화가 생긴 서해안도 칼국수 재료인 바지락 수확량이 줄고 있다. 금강 상류에서 잡은 민물 생선으로만 생선국수를 끓이는 선광집 서금화 할머니는 “금강에서 민물고기가 더 이상 잡히지 않을 때가 가게 장사를 접는 때”라고 말한다. 저렴한 단가로 유혹하는 수입산 재료들의 유혹도 만만치 않다.

맛의 보존, 전통의 보존

전통의 맛을 지키려는 노력이 없다면 향토 국수의 미래는 장담하기 어렵다. 참게를 넣어 국수를 끓였다는 경기도 파주의 참게국수, 대구를 넣어 끓인 강원도 대구장, 꽁치를 넣은 경북 포항의 꽁치국수 등은 더 이상 먹지 못하는 국수다. 지역별로 꽃핀 다양한 국수를 향토 음식으로 지정해 맛을 보존하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한복선 식문화연구원장은 “옛날에는 팔도 음식이 제각각 특징이 있었다면 이제는 어느 지역이든 맛이 중화돼 비슷한 맛이 난다”며 “그나마 지역색을 담고 있는 각 지역의 국수문화를 각 지역사회나 국수 전수자들이 지키고 이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글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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