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세코 1년간 잊은 적 없습니다. 앞으로 이 1년을 또 되풀이하겠지요. 지난 1년간 저는 꿈이 생겼고,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그간 무얼 하셨습니까. 안부가 듣고 싶습니다. 당신과 웃으며 마주할 수 있는 그날까지 부끄럽지 않도록 살겠습니다. 잘 계시지요.”(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전시회에 남긴 한 방문객의 글)
웃고 있는 그 얼굴이 더 슬프다1년이 지나도 슬픔은 그대로다. 지난 5월11일,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오픈옥션 루미나리에 갤러리. 전시장 앞 대로변까지 온통 노란색으로 물들었던 이곳에선 5월5~16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1주기를 기념하는 추모 전시회가 열렸다. 밀짚모자, 자전거, 책 등 고인의 손때 묻은 유품 수십 점이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고인이 걸어온 길을 보여주는 연대표와 흑백사진, 귀향 뒤 봉하마을에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품과 사진, 시민분향소 등에 남겨진 추모 기록물과 영결식 사진 등이 전시장을 메웠다. 주제별로 묶은 전시장 안 곳곳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살아 있는 듯 밝게 웃었다.
“노무현을 버리세요.”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을 버리라 했지만 그러지 못해 전시장을 찾은 이들은 곳곳에서 흐느꼈다. 시민의 발길을 가장 오래 붙잡고 오열하게 만든 곳은 영결식 사진이 도배된 방이다. 검은 상복을 입은 사람들과 노란색 풍선으로 가득 찬 도로의 운구차 사진, 시민분향소에 남긴 시민들의 방명록과 그림이 지난해 5월 뜨겁던 그날을 떠올리게 했다. 시민분향소에 놓였던 재단을 재현하기도 했다.
전시장을 찾은 직장인 김아무개씨는 “1년 전 보내드릴 때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여기 다시 와보니 그를 너무 잊고 지냈다는 생각에 또 미안한 마음뿐”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전시회 일일 자원봉사자로 나선 주부 서아무개씨도 전시장을 돌며 울고 있었다. “노사모 활동을 하며 생전에 노 전 대통령을 3번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있었다”는 그는 “계속 살아 계셔서 우리 자식 세대에게도 비전을 제시해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다”고 했다.
“이의 있습니다.” 흑백사진 속 젊은 날의 노 전 대통령은 주먹 쥔 오른팔을 하늘 높이 치켜든 사진이 많았다. 굽히지 않고,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표정에서 읽혔다. 퇴임 뒤 봉하마을에서 찍은 컬러사진 속 그는 평온해 보였다. 흙을 사랑한 농부였고 손녀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가는 평범한 할아버지였다. 봉하마을의 평온했던 하루를 재현한 듯, 노 전 대통령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사진 앞에 울타리를 치고 “11시경에 나오실 예정입니다”란 푯말을 놓았다.
부엉이바위에는 이제 노 전 대통령이 산다. 유품 외에도 전시장을 채운 여러 미술가의 추모 그림·조각·판화 등에선 부엉이바위와 노 전 대통령을 주제로 그린 작품이 유독 눈에 많이 띄었다. 박재동 화백의 부엉이바위 그림에는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라는 유서 쪽지가 바람에 흩날리고, 허달용 화백이 수묵화로 그린 에는 노 전 대통령과 부엉이바위가 한 몸으로 그려져 있다.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노 전 대통령이 남긴 유서와 달리 작가들은 작품을 통해 미안함과 원망의 마음을 드러냈다. 고경일 작가는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단어로 노 전 대통령의 얼굴이 촛불 모양의 담배 연기로 피어오르는 형상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작가 사인 옆에는 “이제는 누군가 크고 단단한 무엇을 만들 때입니다”란 글이 덧붙어 있었다. 배인석 작가는 같은 날짜의 일주일치 1면을 펼쳐 그 위에 ‘민주주의’란 노란색 글씨를 썼다. 신문에 적힌 날짜는 2009년 5월24~30일. 노 전 대통령의 서거 뒤 영결식이 치러질 때까지의 기간이다. 신문들은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각자의 시각으로 다르게 다뤘다.
전시장 입구 벽면은 전시장을 찾은 이들이 꾸미는 공간이다. 누구는 국화 한 송이 그림을, 누구는 “안녕하신가요?”라는 짧은 물음을 노란색 포스트잇에 담아 벽에 붙였다. 흡사 벽면 가득 노란색 페인트가 칠해진 듯 보였다. 추모 전시를 기획한 노무현재단 쪽은 “평일 1천 명, 주말엔 5천 명 이상의 방문객이 다녀갔다”고 했다. 서울에서 끝난 전시회는 5월20~31일 봉하마을 추모영상관에서 이어질 예정이다.
추모 전시회 외에도 노 전 대통령 추모 문화행사가 5월 내내 이어진다. 지난 5월8일부터 서울·광주·대구·대전을 순회하며 주말마다 열리는 추모 콘서트 ‘파워 투 더 피플 2010’은 이제 두 도시의 공연만 남았다. 5월22일 경남 창원 만남의 광장에서, 23일에는 부산대에서 열릴 예정이다. 전국 6개 도시를 도는 콘서트엔 YB(윤도현밴드), 강산에, 안치환과 자유, 노찾사, 이한철 밴드 등이 참여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처음 열린 추모 콘서트 무대에 올랐던 프로젝트 밴드 ‘사람 사는 세상’은 올해 공연에도 빠지지 않았다.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 이병완 전 청와대 비서실장, 정연주 전 한국방송 사장 등으로 결성된 이 밴드는 ‘고음불가’ ‘불협화음’이어도 관객의 박수와 환영을 받는다. 서울에서 열린 첫 공연을 보기 위해 강원도 강릉에서 올라왔다는 한 시민은 “유품 전시관에서 그분의 숨소리를 듣고, 콘서트장에서 감동적인 공연을 관람했다”고 후기를 남겼다.
‘노란 선을 넘어서’란 이름의 특별 전시회도 열린다. 이념과 정치적 성향을 떠나 노 전 대통령을 기리는 예술인들이 여는 전시회다. 강요배, 김정헌, 노순택, 임옥상, 이반 등 작가 37명이 함께한다. 5월26일~6월6일 서울 정동 경향갤러리에서 볼 수 있다. 전시 기획을 맡은 정영목 서울대 교수(서양학)는 전시회 주제에 대해 “좁게는 판문점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이 군사 분계선을 넘어 북한을 방문했던 정치적 사건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넓게는 모든 경계와 금기의 터부를 넘어 더 나은 미래를 지향한다는 일종의 상징으로, 열린 마음을 갖자는 자성의 목소리를 담았다”고 말했다. 주최 쪽은 ‘사람 사는 세상’ 홈페이지(knowhow.or.kr)에 작품 도록을 올려 소개하고 판매할 예정이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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