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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그녀의 완벽한 하루〉외

등록 2010-02-10 15:53 수정 2020-05-03 04:25
〈그녀의 완벽한 하루〉

〈그녀의 완벽한 하루〉

〈그녀의 완벽한 하루〉
채민 글·그림, 창비(031-955-3333) 펴냄, 1만2천원

“가는 비… 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 가는 비… 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기형도의 ‘가는 비 온다’)

희정은 동사무소에서 복지 분야 일을 한다. 곧 1천 일이 되는 남자친구는 약속을 펑크내고 문자로 미안해한다. 배가 아픈데도 성관계를 조르는 남자친구와 만난 다음날, 혼자 살던 김발근례 할머니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맹장 수술을 하고 창밖을 보는데 비가 내리고 있다(‘비오는 날’). 음악도 있고 비디오도 있고 과자를 씹는 소리도 있는데, 희정의 방은 적막하다. 그와 대조적으로 동사무소, 독거노인의 집, 자판기 앞의 공간에서는 오가는 대화로 말풍선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 역시 ‘적막하다’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만화가 채민의 데뷔작 는 시를 앞에 배치한 단편만화 9편으로 구성돼 있다. 시와 단편만화는 아주 가는 끈으로 연결된다. ‘그 여자는 거기 없었다’ 앞에 있는 최영미의 시 ‘지하철에서 2’에는 ‘신림역’ 안내방송이 겹친다. 하지만 시가 품은 심상은 만화를 통해 꽤 깊어진다. 작은 출판사의 직원 미영은 신림역에 내리며 굳게 다문 왼쪽 문으로 눈길을 돌린다(‘내리실 문은 오른쪽 옳은 쪽입니다… 문득 나는 굳게 다문 왼쪽 입口로 나가고 싶어졌다’). ‘옳지 않은’ 왼쪽 입구로 나가는 일은 갑작스럽다. 미영은 출판된 책의 감수자에게 전화를 걸고 대전에 있는 감수자는 기대도 하지 않으면서 “직접 갖다주면 좋겠는데…”라고 말한다. 미영은 대전을 간다. 장면 전환은 재빠르다. 그보다 작가가 공들이는 장면은 머리를 묶고, 한 숟가락 한 숟가락 도시락을 먹고, 풀린 머리에서 끈이 끊기는 일 따위다.

세상 제일 외로운 시인의 시어가 만화를 통해 더 외로워지는 것은 만화가도 외롭기 때문이리라. 시어만큼이나 정갈하게 대사를 쓰고, 솜씨 있는 조리사의 칼질처럼 예리하게 삶을 저며낸다. 일본 만화가 나나난 기리코()와 그림체나 스토리의 깔끔함이 비슷한데, 한국 역사와 사회 풍경이 잘 녹아 있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낭비와 욕망〉

〈낭비와 욕망〉

〈낭비와 욕망〉
수전 스트레서 지음, 김승진 옮김, 이후(02-3141-9640) 펴냄, 2만1천원

산업적으로 생산된 물건들은 결국 모두 쓰레기가 된다. 현대사회에서 상품이 쓰레기가 되는 주기는 훨씬 더 빨라졌다. “이제 이건 쓰기 싫어졌어”라는 이유만으로도 쓰레기가 된다. 천 기저귀 대신 일회용 기저귀를 쓰게 되듯 거대한 쓰레기더미를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현대산업은 성장한다. 저자는 쓰레기의 생산을 사회·문화적인 과정으로 보면서 시대 변화를 따라 고찰한다.


〈메두사의 시선〉

〈메두사의 시선〉

〈메두사의 시선〉
김용석 지음, 푸른숲(031-955-1410) 펴냄, 1만5천원

철학자 김용석의 에세이다. 에세이라도 아주 가볍지는 않다. 그래도 ‘냉철함’ 대신 상상력을 발휘했고, 난무하던 각주를 ‘도움말’ 정도로 정리한 저자의 가장 가벼운 책이다. “철학자에게 에세이를 쓰는 일은 철학의 본질에 충실한 것이다. 철학은 실험적 사유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가 줄곧 관심을 가져온 과학적 사유와 신화적 은유를 철학적 성찰에 연계한다.


〈영국인 발견〉

〈영국인 발견〉

〈영국인 발견〉
케이트 폭스 지음, 권석하 옮김, 학고재(02-745-1722) 펴냄, 2만5천원

영국인다움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보고서. 영국인다움의 규칙을 찾아내고 그러한 원리가 영국인의 행동에도 그대로 미침을 참여관찰자적 방법으로 밝혀낸다. 예를 들면, 영국인은 거의 병적인 사생활 보호 욕구를 지니고 있다. 억제된 사교 욕구는 ‘퍼브’의 자유분방함으로 폭발한다. 웨이터가 따로 없는 곳에서 영국인은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서로 별명을 부르며 소집단 사교 분위기를 연출한다.


〈난, 죽을 때까지 여자로 산다〉

〈난, 죽을 때까지 여자로 산다〉

〈난, 죽을 때까지 여자로 산다〉
수지 라인하르트 지음, 강혜경 옮김, 성균관대학교 출판부(02-760-1382) 펴냄, 1만2800원

나라가 ‘한국인 늘리기’에 나섰다. 아기를 안 갖기로 결정한 사람은 비애국자로 몰리는 상황이다. 책은 “결혼한 여성이 꼭 아기를 낳아야 하는 걸까”라고 묻는다. 아기를 안 낳는 것은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문제라고 강조한다. 아이 낳는 것 말고도 얼마든지 흥미로운 경험이 많으며, 가족을 둘러싼 사회적 신화를 철저히 파헤쳐볼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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